양주관아지 복원 조감도
김성수의 '양주문화기행2'
임금도 일어서서 맞이 한 ‘양주목사’
임금이 ‘평양감사’를 맞이할 때 앉아서 맞이하지만, ‘양주목사’를 맞이할 때는 일어서서 맞이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만큼 양주목사의 자리가 대단했다는 것이다. 품계로 보면 양주목사는 정3품이요. 평양감사는 종2품으로 평양감사가 한 단계 위이다.
그러나 양주목사는 양주 진관을 겸하고 있고, 관할권이 현 양주시는 물론 연천, 마전, 적성, 원평(지금 파주), 교하, 고양, 영평, 포천, 가평현 등 지금의 경기 북부 대부분을 총괄하고 있다.
또 양주목사 관할지에는 왕들의 선조 능(동구능, 광능, 태능, 서오능, 공능, 온능, 소령원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능은 종9품부터 종7품까지의 능참봉이 관리하고 있지만 능을 그 관리하는 관료를 관리하는 책임자이기도 하다.
특히 능참봉은 하위직이기는 하나, 능을 관리하고 제사를 받들기 위해 능위전을 하사받고, 연료를 구할 수 있는 산과 노비를 둘 수 있어 지역 경제권을 가진 막강한 권력자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 묘를 관리해 주는 묘지기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듯 이런 전통의 연장선에서 왕들의 선조 능을 관리하는 양주목사에게는 특별함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양주지역은 임금의 사냥터로 사냥을 할 때 마다 경기관찰사와 양주목사는 필히 대동했고, 사냥시 몰이꾼은 대부분이 양주백성이 동원되었다.
오죽했으면 조선왕조실록에 양주 목사가 임금에 고하기를 “올해 양주 백성이 강무(사냥)에 자주 동원됐기에 농사를 제대로 못 지었다”며 “세금을 감면해 달라”는 상소도 있다. 그런 연유로 양주군수는 임금을 가까이 볼 수 있는 자리라 양주목사의 자리는 요직 중에 요직이었다. 그래서 십만냥을 허리에 차고, 학을 타고, 양주목사가 되는 것을 당대 최고로 쳤기에 양주몽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고로 경기도의 옛 지명은 ‘양광도’로 이는 경기도에서 가장 큰 지역인 양주와 광주(현재 경기도 광주임)를 합한 이름이다. 이런 지명은 전라도가 전주+나주, 경상도가 경주+상주, 충청도가 충주+청주의 앞글자를 합쳐 부르는 것과 같다. 목사 직책은 고려시대인 983년(성종2년) 지방제도 정비과정에서 당시 전국8도 주요 거점지역을 광주(廣州), 충주, 청주, 양주, 공주, 승주, 전주, 나주, 진주, 상주, 황주, 해주 등 12목으로 정하면서 그곳을 관할하는 최고위직 공무원을 목사라고 불렀다. 도(道) 이하 지방직으로는 대도호부, 목사가 정3품 당상관, 군수는 종4품, 현령은 종5품, 현감은 종6품이고, 관찰사 또는 감사가 종2품이니 양주 목사의 지위는 대단했다고 보여진다.
양주대모산성 입구
또 임금이 사냥하는 것을 강무라고하는데 목적은 단순한 사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궁중 수비대의 훈련과 각급 부대의 연합훈련의 성격도 있고 대소 실료들의 위로연의 자리이기도 했다. 강무는 왕권이 강했을 때는 정기적으로 행해졌으나 신(臣)권이 강해졌을 때는 봄에는 농사철이라, 여름에는 장마와 질병이 창궐해서, 가을에는 추수기라, 겨울에는 춥고 동사 할 가능성 등의 이유로 신하들의 반대가 많았고, 조선 중, 후기에는 거의 행해지지 못하였다.
특히 왕권이 최고점에 다 달았던 연산군 시대는 금표까지 세워놓고 수시로 강무를 즐겼지만, 그로 인해 폐위되기도 했다. 강무 때문에 생긴 마을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대표적인 동네가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삼상리, 은현면 상패리, 하패리, 광적면 가납리 일패리 등이고, 남양주 일패동, 이패동, 삼패동의 이름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이는 강무 할 때 몰이꾼들을 일 소대, 이 소대로 백성들을 동네 단위로 편성하고, 동원했기에 마을 이름도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글/김성수 전 국회의원
(*본고는 김성수 전 국회의원이 발간 준비 중인 ‘양주문화기행2’ 미공개 원고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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