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순 원장의 삶과 예술세계(1)
중국을 떠나 조국으로
지난 9월15일(목)오후7시, 북경기신문 노종호 홀에서 열린 통일문화재단(이사장/서기원) 주최, 2011통일 가을 논단에는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의 저자 김영순 원장(74세, 최승희무용교육원)을 초대, 그녀의 경험한 북한의 삶을 통해 북한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그가 고백한 이야기를 3번에 나눠 연재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진행은 현성주 편집국장 맡음) 김 원장께서는 무용가, 작가, 회장 등 여러 가지 직함이 있지만 오늘은 편의상 최승희무용교육원 원장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원장으로 존칭하고자 합니다. 먼저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에서 성장 했으며, 평양예술대학 무용학과를 입학하게 된 동기부터 말문을 열어주시죠.
=저의 고향은 경남이고 안동 김씨이며 부모님은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중국 심양으로 이사 왔고, 저는 1937년 중국 심양 서탑에서 태어났다. 오빠는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여 활동했고, 그 후 북경, 화북성을 거쳐 1945년 해방이 되자 우리가족은 평양으로 이주했다.
1947년 임시인민위원회가 선포되기 이전까지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교회를 다녔고, 찬송가도 곧잘 따라했다. 평양 제2인민학교에서 무용을 시작했고, 나남여자중학교 시절 6,25가 발발했고, 1950년 10월 말부터 전세가 나빠지자 북한의 간부가족들은 중국으로 피신했고, 나도 흑용강성 녹도촌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북한 학교들이 속속 문을 열었고 북한이 전승 기념일로 치는 1953년 7월 27일까지 운영되다. 귀국사업이 시작되자 우리는 평양으로 돌아왔고, 평양학원(초대 간부 양성소)출신으로 제3근위 사단의 참모장으로 6,25전쟁에 참여 했던 오빠는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항일투쟁, 6.25참전가족이므로 평양에서 우대받으며 1953년에 개교한 평양예술대학을 신청 할 수 있었다.
-평양예술대학에서 성혜림을 만났는가?
=17살 때인 1953년 11월, 20대 1의 경쟁을 뚫고 평양예술대학에 입학했다. 성혜림(김정일의 처로 김정남을 낳았다)하고는 이때 안 것이 아니고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부터 11년제(1950-1956년) 중학교 과정부터 동창이었고, 전쟁 후 평양예술대학에서는 나는 무용을, 성혜림은 영화연극을 공부했다. 성혜림은 쌍꺼풀이 없는 가는 눈매에 웃으면 양쪽 보조개가 들어가는 귀여웠고, 말씨는 서울 말씨를 썼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조선인민단협주단에 입대했고, 성혜림은 조선예술촬영소에 배치됐다. 성혜림은 러시아에 유학 중인 작가 이기영씨의 아들 이평과 연애했고, 이평이 화장품을 보내오면 우리는 나눠 쓰기도 했다.
-올해가 최승희 선생 탄생 100주년 되는 해로 최승희 선생의 사사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승희 선생을 소개해 달라
=나는 클레식 발레는 러시아무용대학 발레학과를 졸업한 조성찬 선생에게, 한국무용은 최승희 선생에게 사사(師事)를 받았다. 그는 항상 한복차림이었고, 165cm의 키에 철저한 연습을 강요하는 매서운 선생님이었다. 그 덕에 1956년 졸업 후 최승희 선생의 작품에 찬조 출연하기도 했다.
최승희 선생은 중국 경극과 인도 무희, 일본의 이시이 바꾸 선생에게 배운 현대무용을 통해 현대적인 우리민족무용을 세계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춤사위로 만들었다. 독무와 군무로는 석굴암의 보살, 초립동, 웅헤야, 한삼춤, 단검무 등이 있고, 1959년 음악무용서사시 ‘영광스런 우리조국’에서는 아리랑으로부터 시작하여 토지개혁, 농민춤 등 20여종의 춤들을 선생님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창작발표하기도 했다. 나는 1967년까지 이 작품을 연습하기도 했다. 최승희 선생은 1958년 숙청을 당해 1967년 평남 북창관리소(정치수용소)에서 57세의 나이로 영양실조로 죽음을 맞았다. 세계적인 무용가의 말로치곤 너무 안타깝다.
-대학 졸업 후 인민군 협주단 무용배우로 평양시 보통강구역 상점상업부 지도원으로 근무하는 등 북한 특권층으로 산 것으로 알려졌는데?
=총정치국 산하 예술단으로 국, 내외 공연을 통해 북한체재를 선전하는 선전선동부에서 13년 근무했고, 상점상업부는 평양의 고위급들이 이용하는 상점으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로 외국으로 발령받은 대사급이나, 항일투사, 북한고관이 물표(북한당국이 발행하는 교환권)를 갖고 오면 양복을 맞추거나 필요물품으로 교환해 주는 곳으로 당시에는 일제가 많이 있었고, 지도원의 권한도 많았다. 그러나 1967년 김정일 세습체제를 공고이하기 위해 숙청을 시작했고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치욕스런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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