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송림 칼럼
‘젊은 날의 풍경화 영국신사 미아리 백작’
내 젊은 날의 한 폭 풍경화를 떠올리면 영국신사 미아리 백작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조정하(사진, 추억의 그 시절 필자와 함께) 선생님으로서 워낙 멋쟁이라 친구 분들조차 영국신사라 불렀는데, 나는 실제인물을 놓고 ‘미아리 백작’이라는 작품을 몰래 구상할 정도였다. 1970-80년 무렵 나는 소위 문청(文學靑年)시절을 홍역처럼 앓으며 말술을 마셔야 대작을 쓰는 줄 혼돈, 너 나할 것 없이 글벗들은 실로 기고만장했다.
더러는 셀프컨트롤, 극기(克己)라면서 머리를 빡빡 깎고 절간에 머문다든가, 탄광촌에서 서툰 광부로 한철을 보낸다든가, 하다못해 창녀촌이라도 기웃대야 그것이 경험, 체험적 문학수업인 양 착각하는 얄궂은 풍토가 유행병처럼 창궐하던 난세였다. 비록 날이면 날마다 데모로 거리에 최루탄 냄새가 떠날 날 없던 군사독재 시절에 대한 젊음의 또 다른 자학적 저항이라 하더라도 참 치기만만했다.
그야 어쨌든 절간도 탄광촌도 창녀촌조차 못가는 영혼도 육신도 헐벗은 내 청춘의 유일한 탈출구 내지는 해방구는 미아리 길음 시장 막걸리 집 <김포집>이다. 김포가 고향인 아담사이즈 주인할머니가 독에 담은 막걸리를 잔술로 팔던 시장 주변의 작고 허름한 대폿집인데, 거기에 가면 조정하 선생님을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조선생님은 항상 정장에 가까운 반듯한 옷차림에 중절모까지 쓰고 주량이 장난이 아닌데도 시종일관 전혀 흐트러진 자세를 보인 적이 없었다. 술을 시작했을 때나 끝났을 때나 항상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환갑이 넘도록 술을 마시며 비교적 술버릇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아마도 그분 영향이 조금은 미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자고로 술은 어른들한테 배우라고 했던가? 김포집의 단골은 조선생님 외에도 당대의 명사들이 심심찮게 드나들며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조풍연, 김대현(♬‘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의 작곡가), 이중모(성악가) 선생님들이 대표적인데, 조풍연 선생님은 방송국 등에 출연하여 사례금 봉투를 받아오면 집에 가기 전에 꼭 여기부터 들러 ‘개봉식’을 했다. 그때 운 좋게 거기 조우하면 그날의 ‘술고픔’은 완전 해갈이다. 한번은 역시 김포집 단골인 초등학교교사와 정릉 자택까지 초대받아서 사모님의 정통궁중요리를 잘 대접받은 기억이 어제 같다.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겠지만, 그때는 어른들이 젊은이들을 보살펴주는 인정과 넉넉함이 좋았다. 주막에서 젊은이들이 안주도 없이 문학 운운하고 무조건 떠들어대면 슬그머니 안주와 막걸리 한주전자까지 시켜줌으로서 격려를 해주는 옆 좌석 어른이 실제로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지방 부잣집 아들의 하숙비 오는 날 ‘니나노집’에 빈대 붙어 따라간 적이 있는데, 이때의 니나노집이란 한복을 입은 우리 또래의 아가씨들이 싸구려 안주와 막걸리를 파는 데였다. 그녀들은 젓가락을 한풀이라도 하듯 술상에 죽으랍시고 두들기며 ♬‘니나노 늴리리야~’ 따위 유행가를 청승맞게 불러 젖히는, 요컨대 7080식 방석집이다. 요즘은 이런 집을 발견하기도 어려운데, 그때만 해도 남동생 대학공부 학비를 번다든가 병든 부모님 병원비 벌려고 공장의 열악한 임금과 환경을 벗어나 니나노집에 출퇴근하는 시골출신 아가씨들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뭄에 콩 나듯 받는 서푼어치 팁이라도 생기면 영업이 끝난 후 포장마차에 손님을 데려가 그 돈으로 되레 소주를 사주는 가당찮은 낭만파가 눈물겨웠다. 아, 그래서 나는 그 때를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낭만의 계절이라 말한다.
길음 시장사람들은 유난히 6·25 전후에 월남한 실향민이 많았다. 조선생님 역시도 평북 박천 출신이다. 언젠가 수해가 심해 이북에서 구호물자로 쌀이 내려온 적이 있었다. 이북 고향 쌀을 한줌씩 모아 송편이나 시루떡을 만들어 이웃 동족끼리 나눠먹자던 사람이 조선생님이다. 그의 가슴에 흐르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훔쳐보며 나는 얼른 막걸리 잔을 벌컥벌컥 비웠다.
조정하 선생님과는 김포집을 베이스캠프나 아지트로 하고 시장 안 먹자난장 꼼장어 집도 가끔 들렀다. 연탄불 드럼통을 끼고 둘러앉아 구워먹는 꼼장어가 별미인데, 거기서 만난 홍기삼 문학평론가도 생각난다. 나중에 동국대총장이 된 그분인데, 조선생님의 대학 후밴 줄 안다. 조선생님은 문창과 출신인데 서러벌예대 연영과 교수다. 두 선생님들에게 문학과 연극에 대한 현장강의를 듣고, 나는 ‘드럼통 강의’라 불렀다.
드럼통 강의의 주된 학생은 나와 조선생님의 장조카인 조남철 문청이다. 조군은 그때만 해도 소설습작에 빠진 열혈문학도였는데, 문학박사가 되더니 세월이 흘러 지금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총장이다. 그 외도 일찌감치 세상을 뜬 이진(한학의 귀재)을 비롯해서 송복(대원고 교사), 김수룡(SBS PD) 군도 가끔 참석해 도강했다. 드럼통 강의의 학도들은 수업료를 내는 게 아니라 술과 안주를 실컷 얻어먹고 통금 전 집이 먼 선생님이 있으면 택시를 잡아주는 게 고작이었다. 조선생님은 집도 가까워 예대생들이 '세느강'이라 부르는 개천 건너 학교 산자락에 파묻혀있었다.
서라벌예대가 중앙대학에 통합되면서 조교수님은 학교를 홀연히 그만 두시고 ’70년도 중반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월남하여 여기서도 정착 못해 끝내 미국으로 떠나시기 전 나는 ‘보헤미안’의 마지막 국토순례에 동행하는 영광을 가졌다. 여행지에서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까운 산에 올라 운동을 하시던 선생님, 낮술을 가급적 삼가 하시며 건강을 챙기시던 선생님은 3년 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버리셨다.
워싱턴 한인교회묘지에 묻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그새 몇 번 조국을 다녀가셨지만, 장조카가 총장이 되면 꼭 취임식에 참석하시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미완성인 <미아리 백작> 대신 이 짧은 글이라도 쓰려고 길음 시장을 다시 찾았다. 어쩌면 명소였던 ‘김포집’과 ‘드럼통 강의실’은 물론 서울 시내에서도 뽐냈던 전통 재래시장의 자취는 ‘인걸’과 더불어 온데간데없고, 깔끔한 현대식 시장에 마트만 낯설게 버티고 섰다. 속절없이 흘러가버린 그 우울했던 젊은 날의 초상화와 ‘과거의 영광’을 찾아 헤매듯 배회하다가 오래 만에 조남철 총장이라도 만나서 한잔 술에 살짝 영국신사 미아리 백작에의 추억페스티벌이라도 벌여야겠다.
글/ 최송림(본지 논설위원,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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