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송림 칼럼
삶과 죽음의 외줄타기 광대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밤새 안녕’이라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다. 지난 6일 일요일 아침 8시 10분, 필자는 잠자리에서 문자 한통을 받는다. ‘손전화’에 이름이 뜨지 않는 걸로 봐서 입력된 번호가 아니다. 그만큼 낯선 사람의 무슨 장난문자나 스팸 메시지인 줄 알고 무시하려다가 왠지 불길한 마음이 들어 눈을 비비고 확인했다.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저는 주선홍 씨 딸 하나라고 합니다. 다름 아니오라 저희 아버지께서 오늘 새벽을 끝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문자는 조금 더 계속되고 있었으나 거기까지만 읽고 뒤통수를 맞은 듯 벌떡 일어나 즉시 발신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상불 전화를 받은 하나 양은 울먹이며 아버지의 죽음을 거짓말처럼 확인해주었다. 순간 이 광활한 세상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외줄타기 하는 광대의 모습이 필자를 삼키듯 확 덮쳐왔다.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도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연극인 주선홍 고인(故人)과 통화한 것은 바로 어제 낮이 아닌가? 이거야말로 밤새 안녕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필자는 올해 ‘충남 찾아가는 문화활동사업’하고도 ‘다원예술분야’ 평가위원으로서 전날 한 공연단체의 부여 공연에 갈 일이 생겼다. 공연장을 찾는데 자신이 없던 필자는 한국연극협회 예산지부장인 고인에게 전화를 걸어 시간나면 승용차로 좀 데려달라는 부탁을 넣었더니 평소같이 흔쾌하게 기차로 예산까지만 내려오랍신다. 하지만 공연날짜가 행정착오로 잘못 전해져 내려갈 필요가 없어졌다. 필자가 내려갔다면 아마도 그가 숨지는 현장에 있었든가 다른 희망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생각도 해본다. 그야 어쨌든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고인이 사망하기 전날에도 건강하게 통화를 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부랴부랴 고인을 잘 아는 서울의 동료 연극인들과 함께 장례식장인 예산 명지병원으로 달려갔다. 벌써 문상객들이 많이 와 있었다. 배우로서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인 고인의 영정은 마치 연극 속의 한 장면처럼 우리들을 관객인 양 바라보고 있었다.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묘한 기분의 필자로선 생각할수록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는 가을축제 지역행사를 마치고 뒤풀이 자리에서 저녁을 먹다가 그대로 쓰러졌다는 것이다. 뇌졸중이다.
마침 토요일 오후라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지 119구급차에 실린 채 예산읍내 병원 몇 군데를 돌다가 천안 큰 병원까지 갔다. 그러나 새벽미명을 헤매는 영혼 그대로 무의식의 고통 속에 방황하다가 끝내 숨을 거뒀단다. 서울 같은 대도시였다면, 쓰러지는 즉시 큰 병원으로 바로 옮겨 수술에 들어갔다면 목숨을 건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모든 게 운명인데 어쩌랴!
밤이 되어 빈소를 빠져나온 몇 명이 그와 자주 가던 예산장터 국밥집을 찾아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그때마침 손님도 없는 빈 장터 외등 아래서 혼자 품바타령을 하며 엿판을 벌인 장돌뱅이의 치명적인 ‘고독잔치’를 보고 고인의 영혼을 만나듯 전율했다.
고인이 일터처럼 자주 공연하던 예산문예회관 앞마당에서 이승연 배우 사회로 연극인 주도의 노제가 열렸다. 노제의 제사장인 전인섭 충남연극협회지회장을 비롯해 충남 각 지부장이 다 모였는가하면, 김영천 충남예총회장과 김태원 사무처장도 분향했다. 충남 연극인들뿐 아리라 각 장르 예술인과 유족, 친척, 선후배, 친구, 지인들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흐느끼며 애도했다. 채필병 천안지부장은 필자가 쓴 제문을 낭송했고, 오태근 공주 한국공연예술체험마을 촌장도 조시를 바쳤다. 이렇듯 산 자들은 고인이 한창 일할 나이인 51세에 본향(本鄕)으로 ‘돌아갔다’고 통곡하지만 나는 왜 자꾸만 그가 ‘세상을 버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지 모르겠다.
고인은 이혼 후 남매를 키우며 한 눈 팔지 않고 ‘극단예촌’을 창단해 배우,연출, 작가, 제작자로서 북 치고 장구 치며 오직 가난하고 험난한 연극 외길만 걸어왔다. 서울에서 연극을 하다가 일찌감치 고향에 내려가 역사의 갈피에서 숨 쉬는 광맥 같은 향토문화를 줄기차게 발굴, 무대화를 통해 널리 알려온 작업은 그의 소중한 업적이다. <의좋은 형제전><추사 김정희><매헌 윤봉길><분례기><백제 마지막 불꽃 임존성> 외에도 마지막 유작이 된 올해 충남연극제 참가작 <삽다리 블루스>는 필자의 초연창작극이기도 하다. 역시 필자의 작품인 <13월> 공연에서 어렵사리 만난 여배우로서 내년 봄 결혼을 전제로 함께 산 동거녀의 ‘미망인 까만 상복’이 무척이나 애달프다.
고인은 홍성추모공원화장장을 거쳐 예산군 신양면 선산에 도착, 생전에 꿈꾸던 수목장으로 대자연의 품에 안겼다. 산중 장군처럼 늠름한 선영 지킴이 낙락장송(落落長松) 장군목(將軍木) 뿌리에 묻힌 것이다. 필자는 그 장군목을 <주선홍松>이라 이름 짓고, 충남연극의 맏형인 류중열 연출과 함께 마지막으로 주선홍송을 끌어안으며 작별을 고했다. 명년 봄에 진달래꽃이 활짝 피면 그를 보듯 다시 찾아오마고 마음을 추스르지만 글쎄, 세상일 앞날을 어찌 장담하랴! 하산하면서 필자가 감히 고인을 ‘연극열사’라 칭했던 노제의 제문을 다시 한 번 뇌어본다.
아,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 어제 만나 활짝 웃던 / 예산사람 주선홍 연극쟁이 / 어디로 갔단 말인가 / 어디로 갔단 말인가 / 밤새 안녕이라더니 / 용트림하듯 하늘로 치솟았나 / 가을의 끝자락에 휘말려 낙엽처럼 떠났나 / 그 다정다감하고 넉넉한 얼굴로 / 예산장터 국밥집에서도 연극이요 / 예당저수지 어죽집에서도 연극타령 / 연극 연극 연극밖에 모르던 / 바보 같은 외길인생 / 그래서 누구는 연극전사라고 / 또 누구는 연극열사라고 / 그래, 잘났다 전사여 열사여 / 어찌 노모와 자식 남매를 두고 / 구천 그 먼 길을 혼자서 / 훌쩍 떠날 수 있단 말인가 / 벗들은 뒤통수를 맞은 듯 / 텅 빈 하늘만 바라보네 / 오호통재라, 임을 보낼 수 없는 사람들이 / 하나 둘 이렇게 모여 / 마음속에 가두고 사로잡아보지만 / 차디찬 현실은 부질없다 도리질일세 / 주선홍 연극열사여, / 이제 못 다한 일 무거운 짐일랑 / 우리에게 맡기시고 / 고통도 눈물도 없는 그곳에서 / 편히 쉬소서 / 삼가 합장 명복을 비나이다.
‘주선홍 연극열사를 보내며’ 추모조시 전문
(최송림 I 본지 논설위원,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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