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일의 7080 에세이
전설의 4연승 무쇠팔 최동원
"사랑하는 내 아들 동원아. 내 아들로 있어줘서 너무나 엄마는 행복했다"
우리나라에 야구는 언제 누구로부터 도입이 되었을까? ‘1901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YMCA 를 창립한 선교사 질레트는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를 설립했고, 1905년 청년회원들에게 서양식 공놀이인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라고 대한체육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야구가 보급된 것은 1905년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야구가 60~70년대 고교야구에 의해 최고 인기 스포츠가 되었고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되면서 그 인기는 날로 더해, 이젠 600만 관중이 찾는 한국 최고의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1984년 한국 시리즈 4승은 영원한 기록
야구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대한민국 국가대표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격을 높여주었었고, 이들은 부와 명예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야구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었고 이른바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감동을 우리들에게 선물했었다.
그래서 그들을 우리는 ‘영웅’ 혹은 ‘스타’라며 좋아하며 심지어는 존경까지 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는 영웅 두 사람을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다. 바로 장효조(1956~2011년)와 최동원(1958년~2011년)이다. 오늘은 최동원 이야기만 하자. 최동원은 향년 53세의 생을 마감하고 지난 14일 오전2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연세대와 실업야구팀 롯데를 거쳐 25살의 나이인 1983년 롯데 유니폼을 입고 프로무대에 데뷔했다. 그리고 최동원은 이후 놀라운 기록들을 남겼다. 특히 프로야구 전설로 남아있는 1984년 한국 시리즈 4승은 영원한 기록으로 남았다. 두 달 전 그는 끔찍한 병마와 싸우느라 수척해진 모습으로 팬들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대한민국 프로야구 최고 에이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병을 숨겼던 그의 인터뷰는 마지막 작별 인사가 돼버렸다. "쉬고 있다 보니까 자꾸 살이 쪄요. 80킬로 90킬로 넘어가는데... 뭐 생채식도 하고 이러다 보니까 쫙 빠지는데 욕심 부리다 그것을 너무 오래 했어요"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한국 야구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만들어 냈던 그는 이 말을 끝으로 팬들과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알았심더. 한번 해보입시더”
다시 1984년 한국 시리즈로 돌아가 보자.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전력은 막강했다. 오죽 했으면 삼성 김영덕 감독은 시리즈를 앞두고 “롯데 에이스 최동원이 정규 시즌에서 우리와 붙어 재미를 보지 못했다”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이에 롯데 강병철 감독은 “게임은 해봐야 한다.
누가 누굴 마음대로 이기겠나? 승부를 미리 말하지 말자”라고 응수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삼성이 당연히 우승하리라 믿었다. 당시 삼성은 강력한 라이벌인 지금의 두산베어스 전신 OB베어스를 피하기 위해 시즌 막판, 약체인 롯데와의 경기에서 져주며 코리안 시리즈 상대로 롯데를 선택한 했다. 물론 누가 보아도 승부 조작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기사 제목을 "야구냐 야바위냐"라고 올릴 정도였다. 또한 당시 ‘주간한국’에 인기리 연재되었던 소설가 김홍신의 ‘인간시장’에 실리면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었다. 어쨌든 롯데는 삼성의 상대가 아니었다고 다들 믿으며 1984년 한국시리즈가 시작되었다.
롯데 강병철 감독은 기자들에게 “1, 3, 5, 7차전에 최동원을 투입해 4승3패로 이기겠다”고 말했다. 이 기사를 본 최동원은 강병철 감독에게 “1, 3, 5, 7차전 등판, 이거 너무 무리 아닙니꺼?”하고 불만을 토로했었다. 그러자 강 감독은 미안한 표정과 함께 “동원아, 우야노 여기까지 왔는데”라고 답했고 최동원은 “알았심더. 한번 해보입시더”라며 시합에 나갔다.
최동원은 1차전(롯데 4-0 삼성)과 3차전(롯데 3-2 삼성)을 완투승으로 기록했다. 5차전에서(롯데2-3삼성)는 완투했지만 졌다. 강감독은 6차전 5회에 최동원을 구원 투수로 기용해 6-1로 승리하며 한국시리즈 최종전으로 끌고 갔다. 7차전을 앞두고 롯데 선수들이 더그아웃에 모였다.
최동원은 “객관적으로 열세였던 전력에서 3승3패로 맞선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니 7차전을 보너스 경기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뛰자고 서로를 격려했다” 그리고. 마운드에 오른 최동원도 공을 맘껏 던졌고, 유두열의 3점포로 6대 4로 승리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최동원의 4연승 전설의 시작과 끝이었다.
그가 아마추어 때나 프로에서 무쇠팔이라는 별명으로 공을 던졌을 때 우리는 롯데가 이기던 지단 상관없이 그를 사랑했고 좋아했었다. 그리고 그는 53세라는 젊은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다. 장례식 날 그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내 아들 동원아. 내 아들로 있어줘서 너무나 엄마는 행복했다" 라며 아들의 유골함에서 쉽게 손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바로 우리가 지금 그렇다. “당신이 우리 곁에서 공을 던져주었기에 행복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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