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6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오화영(吳華英)이 우리에게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는 3·1운동의 중심 리더도, 대중을 움직이는 웅변가도, 독립운동의 영웅도 아니다. 다소 생소하기도 하고 낮 설기도 한 오화영이 다가올 세대에 우리가 배워야 할 섬김의 리더십으로 재조명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 화제가 되고 있다.
서정대 식품영양학과 교수인 오순덕 박사는 그가 최근 발표한 ‘菊史(국사) 吳華英(오화영)의 리더십 연구’ 논문에서 오화영은 33인 민족 지도자 중, 유일의 창조적 리더십을 갖고 3·1운동과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해방 후 건국을 위한 정치가로 활동하면서 6·25전쟁 시 서울을 끝까지 지킨 민족 지도자이다. 그러나 납북 되었다는 이유로 그간 오화영 연구가 전무하다고 지적하고 이제는 오화영의 리더십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대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활발한 하면서도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나섰다.
오 박사는 이번 논문에서 오화영을 시기적으로 두 가지로 나눠 생각했다. 첫째는 3.1 독립운동 당시 종교의 필요성과 황해도에서의 독립운동활동, 독립선언을 위한 준비작업과 민족대표의 선정과정, 독립선언, 일본 경찰에 연행 후 취조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들을 분석했고 또 하나는 출옥 후 해방, 6.25전쟁까지 조선정치대학교 학장, 제2대 국회의원으로의 활동 내용을 분석했다.
각종 문헌과 자료에 의존하여 리더십을 분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오화영은 3.1운동을 비롯하여 항일운동 전개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등 많은 활동을 하면서 대한민국 정통성 확립에 기여하면서 오화영이 보여준 리더십 행동들을 다음과 같이 평가 있었다.
첫째, 오화영은 민족주의적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조선의 땅에서 침략자의 퇴거를 당당하게 요구하면서, 조선을 위해 3.1운동이 지방으로 그리고 민중으로 확산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하였다. 지속적으로 신간회 활동, 물산장려운동, 광주학생사건 등 항일 민족운동에 투신하여 3번의 옥고를 치루면서 소신 있게 독립의지를 밀고 나갔다.
둘째, 오화영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목사 신분상의 특성인 진지한 성찰과 지중함, 감리교단 민족대표를 설득하여, 3.1운동이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으로 성공하는데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미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과 함께 독립의 물결이 일어 전국 각지로 퍼져 만세 시위를 안 한 곳이 없었다. 동지들과 연행되어 옥중에서도 의젓한 행동으로 비범함을 보여주었다. 광주학생사건에서도 용기있는 지도력과 충성심과 의연함, 국회의원 출마 연설에서 보여준 한민족 통일을 염원하는 단호함과 신념과 강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셋째, 오하영은 지적자극형 리더십을 실천하였다. 해방 전 원산 사립 광성 소학교 부교장으로 취임하여 육영사업을 통해 문맹을 깨우쳐 민족의식과 애국정신을 배양하여 사직을 바로 잡는데 주력하였다. 해방 후 조선정치대학관 이사를 맡게 되고, 조선정치대학관장에 추대되어, 정치대학으로 승격시켜 정규대학으로 인가를 받고 초대 학장에 취임하여 오늘날 정치대학(현 건국대학교)으로 발전하였다.
넷째, 오화영은 영감적 동기부여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1910년 조국이 일제에 국치를 당하자, 종교를 통한 구국의 뜻을 세워 기독교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으며, 신학전문학교 졸업, 전도사, 담임목사, 주임목사, 3.1운동 개성지역 연락책 등으로 활동하였다.
다섯째, 오화영은 개별화된 배려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독립운동은 3.1운동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2, 제3의 운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3.1독립 만세운동의 중앙지도체는 49인으로 33인 민족대표 이외에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박인호, 노헌용, 함태영, 김세한 등이 기미독립운동 제1선에서 희생되는 이들의 뒷바라지를 맡는 부서를 마련하였다.
오화영은 자신의 역량과 자신이 의도한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행동을 결정한 후 동생 오은영에게 가족을 부탁하였다. 전쟁 중의 피난길이라 하더라도 국회의원으로서 국민에 대한 배려를 소홀이 할 수 없어 서울을 사수하다가 납치되었다.
이제 광복 66주년을 맞이한다. 오화영은 민족자주와 근대화의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격동기 삶을 산 사람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한국 근대사의 형극의 길을 걸어 갔다. 그가 삶 속에서 남긴 ‘창조적 소수자의 리더십’은 한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분단위기를 극복 할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이자 지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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