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송림 칼럼 '낙동강변의 임재선 색소폰 연주자'
최송림 칼럼
낙동강변의 임재선 색소폰 연주자
늦가을 안동하고도 낙동강변의 색소폰 멜로디가 밤하늘을 울려 퍼지는데, 그 주인공은 임재선(63세, 사진 부인과 함께) 연주자다. <안동역에서><황혼의 블루스><낭만에 대하여> 등의 주요 레퍼토리를 뽐내는 그는 순수 딜레탕트 색소폰 동호인으로서 그야말로 낭만파 이모작 인생을 청춘인 양 아름답게 가꾼다.
안동댐 주변 단풍 풍광이나 월영교(月映橋) 난간을 배경으로 연주를 할 때면, 나 같은 떠돌이 여행객 길손은 말할 것도 없고 산책 나온 시민들과 젊은 데이트족들은 가을의 또 다른 정취를 만끽하듯 발걸음을 멈춘다. 사람들의 시선은 아예 무시하고 오로지 자연을 벗 삼아 하나로 어우러지는 이색적인 풍속도를 감상하는 것이다.
구경꾼들은 선천성 소아마비 장애자인 그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결코 순탄치 않았던 삶과 인생이 묻어남을 뿌리칠 수 없다. 그는 일찍이 안동중학교를 마치고 서울 경동고로 유학할 만큼 명석한 두뇌의 수재 형으로서 젊은 날 종로 르네상스 고전음악감상실에 살다시피 할 정도로 클래식 마니아였다. 그 무렵 필자와 인연이 닿아 한때는 삼선동에서 자취생활을 함께 한 적도 있다. 친구는 원래 방앗간에 양조장 집안의 부잣집 아들로 항상 술친구들이 들끓었다. 요컨대 그는 ‘걸주(乞酒)’라는 별호를 갖고 남에게 베푸는 천성을 타고난 벗이라는 말씀이다. 걸주는 말 그대로 ‘술을 청하다’라는 뜻인데, 원래 숨은 뜻은 중국 하나라의 걸(桀)왕과 은나라의 주(紂)왕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포악한 군주를 일컫는다. 두 가지 뜻의 함의를 두루 섭렵한 닉네임을 고집한 그 나름의 철학이 조금은 의미심장했다.
그야 어쨌든 1970년대 국산양주가 막 나올 무렵 혜화동 로터리에 <떼따떼뜨>라는 양주카페를 운영하다가 망한데다가 부친의 새 사업인 연탄공장조차 파산해서 낙향한다. 다행히 아내 권정향, 안동 권씨 정통규수와 사랑의 도피행각까지 벌이며 요란한 연애결혼을 함으로써 안동시에 정착해 1남4녀를 얻었다. 그 동안 몇 번의 사업실패로 험한 꼴을 당하며 건강이 약해진 탓에 그 토록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는데, 어쩌다 친구들과 휩쓸려 한잔 걸치면 종손인 아들 관현 군이 나타나 운전을 대신해 줄만큼 세월이 흘렀다.
그는 아예 승용차 하나를 통째로 활용해 스피커 장치를 하는 등 색소폰 연주 미니 공간시설을 꾸몄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차안에서 연주를 홀로 즐기겠다는 배짱이다. 그에게서 색소폰 연주는 생활의 일부요 삶의 한 방법론 내지는 노후대책 방정식이 돼버렸다고나 할까? 요즘은 색소폰뿐 아니라 소리(唱)에도 빠져 안동지역 공식 판소리경연무대에 올라 당당히 상까지 거머쥐었다고 껄껄 웃는다.
이렇듯 그는 색소폰과 소리로 황혼의 블루스만 즐기는 천하한량 풍각쟁이가 아니라 매일 밤 심야근무를 하는 철저한 생활인이기도 하다. 부인 권여사의 내조와 자신의 노력으로 마련한 모텔의 자정 이후 카운터를 책임진다. 그런가하면 연말에 시집보내는 막내딸 정현 양의 혼사 때 하객들에게 드릴 인사말을 벌써부터 준비하는 자상한 아빠요 가장이다.
새삼 돌이켜보면 그에겐 애당초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출발부터 불공정한 게임인지 모른다. 요컨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리하게 참가된 경주에서 맘속에 ‘걸주’라는 ‘독기’를 품고 육신의 장애를 정신력으로 극복해온 젊은 날의 초상화가 눈부시다. 모진 풍파를 겪고 헤쳐 온 배가 이제야 항구에 닻을 내린 인생만이 누릴 수 있는 평화가 향기롭다. 마치 ‘반월 석 삼(心)’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달구며 투사처럼 그만이 개척한 신천지의 주인으로서 세상을 향해 승리의 나팔소리를 울리는 모양새다.
나는 일 년에 한두 번쯤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그를 찾아가 이런 친구에게서 삶의 지혜와 에너지를 충전해가곤 한다. 안동댐 말고도 이 지방의 명소인 하회마을이나 퇴계서원을 돌며, 때로는 간고등어와 찜닭, 헛젯밥을 함께 먹으며 서울에서 찌들고 찌든 스트레스를 힐링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청년시절 자주 먹던 돼지곱창과 막걸리로 석별의 정을 나눴다. 어느덧 깊어가는 가을도 끝자락을 휘날리며 겨울을 향해 치닫는데, 안동역에서 나를 배웅하고 돌아서는 친구의 뒷모습이 이날따라 무척 따뜻하고 커 보인다.
언젠가 그는 낙동강뿐 아니라 안동역 광장에 세워진 <안동역에서> 노래비 앞에서도 “첫눈 내리는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오지 않는 사람아∼” 멋들어진 색소폰 연주로 여행객을 감동시킬 그날의 모습을 그려보며 나는 청량리 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글/ 최송림(본지 논설위원,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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