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숙 교수의 멋있는 사람의 맛있는 이야기 이태리 단상(15)
이현숙 교수의 멋있는 사람의 맛있는 이야기 이태리 단상(15)
언어가 잘 습득되기 전, 미묘한 맛을 낼 수 없다
이글을 쓰면서 뒤를 돌아보고 또 현재를 조명하게 된다. 과거란 현재를 만들어 낸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태리 시립음악학교 선생님이 되고 나서 느끼게 된 것 중에 하나는 준비된 것은 늘 쓰인다는 걸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주 소소한 것들도 미리 준비되고 쌓아 놓은 것은 절묘한 타이밍에 사용될 수 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음악 책에 이태리 민요나 간단한 노래들이 수록되고 또 음악 시간에 부르곤 했었다. 그 중에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노래가 있었다. 이 노래가 좋아서 계속 반주를 치다가 외우게 된 곡이었는데 가르치는 학생 중에 테너 한명이 이 노래의 가사만 쓰인 종이를 보여주면서 ‘이 노래 아세요?’ 라고 물었다. 마침 외우고 있던 반주가 생각이 나고 멋지게 치자 학생이 금방 따라 부른다. 기분 좋게 웃고 악보 없이도 이태리 민요를 내가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래서 예술가에게는 틈틈이 해놓은 음악 공부는 무엇이든지 쌓여서 적절한 타이밍에 내공이 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또 하나는 언어구조와 생김새의 차이에 따라 소리의 질과 공명이 달라지기 때문에 외국인이 노래하는 경우에는 본토인이 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 그래서 언어를 완전히 파악하기 이전에는 가사가 주는 맛을 완벽하게 표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창이나 민요에서 전해 내려오는 리듬감과 선율과 춤사위가 있다. 이런 우리의 음악은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들이다. 우리는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 문화와 언어가 잘 습득되기 전까지는 미묘한 맛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들이 초보자여서 노래를 잘 못하고 악보를 잘 못 볼지언정 문화적인 것에서 느껴지는 그 차이는 참으로 넓은 강처럼 큰 것이었다.
다행히 나는 기술 적인 면을 듣고 고쳐 줄 수 있는 능력으로 저들을 잘 지도 할 수 있었지만 타고난 것을 볼 때 우리나라 사람이 뛰어넘을 수 없는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 듣기 아까울 정도의 훌륭한 소리를 가진 학생도 많이 있었다. 곡을 외우라고하면 자신의 언어라서 아주 쉽게 외워왔다. 그래서 더 신나게 가르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내가 가르치기 보다는 오히려 배우는 점이 더 많이 있었다. 이태리는 “아 에 이 오 우” 다섯의 모음 밖에 없다. 복합 모음이 없으므로 아주 명쾌하고 발음이 정확하고 얼굴 앞에 붙어있다. 우리는 복합 모음이 많이 있다. “여 야 얘 예 요 유 외 왜 위 웨” 등등. 그래서 전체적으로 한국어를 잘 듣고 있으면 이태리 발음에 비해 어둡다. 그리고 같은 “아” 모음도 전혀 다른 위치에서 소리를 내게 된다. 이태리에서 수년간 가르치면서 비교분석하게 된 결론이다.
난 이태리인들의 활달함이 무척 좋다. 성격들이 화통하고 툭 트인 느낌이 든다. 많이 열려 있고 즐길 줄을 안다. 칭찬에도 인색하지 않다. 그 자신감과 적극성은 로마제국 시대부터 세계를 지배했던 문화의 일부 일 것이다. 그런 점을 볼 때 이태리에서는 자유롭고 나 스스로를 더 표현 할 수 있었던 느낌이 든다. 저들은 양심문화, 우리는 체면 문화다. 그런 차이점이 15년간의 생활을 뒤로 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다시 패턴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 스스로 머리에 버튼을 저장해 놓은 것 같다. 이것을 누르면 언어와 함께 행동모드가 바뀌는 것 말이다. 요즘은 세계가 일일권이다.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 날아가면 바로 다른 언어권, 문화권으로 들어 갈 수 있다. 그리고 개방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여행으로 그들을 이해하는 것과 살면서 느끼는 것은 많은 관점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짧은 시간엔 깊이 있게 이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외국인이 잠시 한국에 머문다고 바꾸어 생각해 보면 명확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오랜 세월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선교사님 후손들이 유창한 우리말과 문화를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고 그런 세월을 그곳에서 보내야 이해되어지는 것들이 있지 않겠는가? 이해란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다음호 계속) 글/ 이현숙 교수(신한대학교)
|
|
[ Copyrights © 2010 북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