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능을 찾아서
가족과 함께 떠나는 북경기 역사순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능을 찾아서
국도3호선을 타고 양주, 동두천을 지나 연천 초입에서 37번 국도로 옮겨, 파주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 나루터가 나온다. 이곳에서 임진강 다리를 건너 남방한계선 인근까지 접근하면, 나지막하지만 기품이 있는 구릉지대에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능을 만나게 된다. 상식적으로 신라왕이라면 경주나 경주 인근에 있어야 하는데 이례적으로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에 위치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호 역사순례는 경순왕을 소개하고자 한다.
경순왕(敬順王)은 897년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가 30세가 되던 해 경애왕이 후백제의 견훤에게 암살당하자 927년 신라 제56대 군주이자 마지막 왕이 되었다. 성은 김(金)씨요, 이름은 부(傅)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다. 경순왕은 8년 재위하면서 민심이 신흥고려로 기울어짐을 살피고, 무고한 백성이 고통과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군신회의(群臣會議)를 소집,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태조 왕건에게 항복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능을 찾아서
이에 아들인 마의태자를 비롯해 김일, 범공, 이순유 등은 강하게 반대하였으나 신라 역사를 마감했다. 이후 마의 태자는 신라회복을 위해 마의를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지냈다고 전해져 지금도 ‘마의태자’로 불리고 있다. 어째든 경순왕은 태조 왕건에게는 자신의 사촌 누이 신성왕후와의 결혼을 주선하였고, 태조 왕건으로부터는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받고 지금의 개성과 가까운 곳에 거주했다.
또 왕건으로 부터 낙랑공주 왕씨와 부인 왕씨 등 태조 왕건의 딸 2명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978년 4월 4일, 경순왕이 죽자 고려는 경순왕의 시호를 내렸다. 왕으로 예우해 장단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경주에 알려지자 경주일가, 친족들은 시신을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이장하려 하였으나, 고려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 수 없다며 반대함으로써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묘 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1747년(영조 23년) 다시 되찾아 정비하게 되었고, 현재는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崇惠殿),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敬天廟) 등에 제향 되고 있다. 현재의 경순왕릉비는 영조 23년(1747)에 다시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746년 10월 14일 장단에서 경순왕의 지석과 신도비가 나왔음을 아뢰는 동지 김응호의 상소가 있고,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 20일 경순왕의 묘를 수치(修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수치란 고쳐 새롭게 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1748년 1월29일에는 고려 왕릉의 예에 준해서 경순왕릉에도 수총군(守塚軍) 5명을 두어 지키게 했다. 이렇게 해서 경순왕릉은 현재의 모습으로 유지 보존될 수 있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능을 찾아서
한편 경순왕비는 1748년(영조 24) 경순왕릉 인근 고랑포 마을 민가에서 후손인 김빈(金礗)과 김굉 등이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74년 이 비는 고랑포 초등학교로 이전되었다가, 1973년 이후 이루어진 경순왕릉 정화에 따라 1987년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가 132㎝, 폭이 67㎝, 두께가 15-18㎝이다. 이인순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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