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 자재암은 민중불교의 산실?
역사스페샬
소요산 자재암은 민중불교의 산실?
요즘 북경기지역 명산 중에 하나인 소요산에 마지막 단풍을 구경하려는 등산객으로 만원사례다. 특히 이곳은 로미오와 쥬디엣의 러브 스토리처럼, 시대를 뛰어넘는 원효와 효석공주의 아름다운 사랑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더욱 애절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곳이 불교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낳은 곳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원효(617~686)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화랑출신으로 태열무열왕의 사위로 당시 신분사회에서 신분이 보장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출가의 길을 선택했고, 당시 불교의 계율을 어기고 우리나라 최초의 파계승이 되었다. 당시 승단의 계율은 엄격해서 이를 어길 경우 교단에서 축출되기도 하고, 승려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빼앗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미 귀족으로 승려로 상당한 명망을 지니고 있던 원효는 왜 자신의 이런 특권을 포기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갔을까?
역사 속에 남아 있는 원효의 흔적을 통해 짐작해 보면, 당시 신라는 불교를 공인(법흥왕14년, 527년)한지 100여년을 지나고 있었다. 불교는 왕실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왕실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국가통치이념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즉 불교는 왕실의 권위를 신성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했고, 승려는 왕실과 밀착하여 기득권에 안착 했다. 그러나 불교는 신라에서 발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었지만, 민중들의 삶의 피폐해 지고, 철저히 소외되었다. 더욱 당시 수많은 전쟁에 최선봉에 서야하는 운명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대안(大安, 원효 스승, 571~644)과 혜공의 영향을 받은 원효는 부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함을 알리고, 문자를 모르는 민중들에게 지극 정성으로 부처님의 이름을 10번만 외치면 극락왕생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주기에 심혈을 기우렸다. 당시 원효의 평등사상의 외침은 혁명적인 생각으로 당시 사회의 최대 반전이다. 더욱이 포교 할 때 민중들과 같이 먹고, 자며 눈높이를 같이했다. 또 그들의 삶의 어려움에 동참했다. 그가 쓴 ‘대승기신론소’ ‘해동소’ ‘십문화쟁론’에 당시 상황을 였볼 수 있는 기록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이로 인해 ‘무지몽매한 사람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이는 원효의 덕택’이라고 삼국유사는 훗날 소개하고 있다.
어째든 1400여 년의 오랜 세월을 건너뛰어 오늘까지 원효의 사상과 그의 실천적 삶을 칭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의 삶 속에서 자신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민중편에 서서 고민하며, 혁명가적 사상가이자, 실천하는 지식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원효의 면모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그것은 요석 공주와의 이야기나 해골물을 먹고 깨달음이 있었다는 등으로 희화화하면서 원효의 사상과 당시 시대정신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효의 본 모습을 찾아 설화 속에 고승이 아니라 역사 속에 인물로 살려 낼 때 비로서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인간의 평등을 부르짖고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진정한 화합의 길을 제시한 위대한 사상가 원효의 참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현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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