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순애보 ‘기생 홍랑’
조선 최고의 순애보 ‘기생 홍랑’
역사 스페셜
조선 최고의 순애보 ‘기생 홍랑’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에 있는 해주 최씨의 선산에 뜻밖에도 조선 선조 때, 기생 홍랑(생몰 연대 미상)이 묻혀있다. 홍랑의 무덤 바로 위에 있는 또 하나의 무덤은 한 사대부와 부인의 합장묘다. 엄격한 신분제도가 존재한 조선시대, 기생은 노비나 다름없는 천민 신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기생 홍랑은 어떻게 명문 사대부 집안의 선산에 그것도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묻힐 수 있었던 것일까?
조선시대 기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조선 해어화사>에는 홍랑의 사랑에 관한 짧은 일화가 소개돼 있다. 선조 때, 시인 고죽 최경창과 홍랑이 연인 사이였다는 것이다. 고죽 최경창은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에서 태어났고,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박순의 문하에서 백광훈 등과 함께 공부하면서 일찍부터 탁월한 문장을 선 보였고, 악기를 다루는 재주도 또한 뛰어났다고 전한다. 최경창은 1568년 과거에 합격했고, 1573년 가을 북도청사로 부임했다. 그가 부임한 곳은 함경북도 경성, 서울에서 천릿길이 훨씬 넘는 변방이다. 고려시대 부터 여진족을 비롯해 수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은 경성은 국방의 요지였고 예로부터 많은 군대를 두고 있었다. 최경창은 이곳에 북도청사, 즉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으로 부임한 것이다. 당시 서른넷의 최경창에겐 이미 처자가 있었지만 경성에 부임할 때는 혼자였다.
한번은 변방에 군사 활동을 나갔다가 그 지역 관리가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 홍랑이 있었다.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를 읊는데 홍랑이 함께 있는 사람이 고죽인지 모르고 그의 시를 읊었다. 이에 고죽이 누구의 시를 좋아하냐고 묻자 홍랑이 고죽 선생의 시를 좋아한다고 대답했고, 그때서야 최경창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는 것이다. 사실 고죽 최경창은 당대의 문인인 송강 정철 등과 교류하면서 조선 중기 8문장가로 불렸다. 특히 율곡 이이는 그의 시를 가리켜 ‘청신준일(淸新俊逸)하다’고 평했을 정도였다. 시와 풍류를 아는 젊은 관리 최경창과 재색을 겸비한 경성의 이름난 기생 홍랑은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경성에서의 임기를 마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면서 두 사람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죽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홍랑은 경성에서 쌍성까지 며칠 길을 마다하지 않고 따라 왔지만 이별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몸은 함께하지 못하지만 마음만이라도 함께하고 싶다며 시 한수를 올렸다.
산에 있는 예쁜 버들 골라 꺾어서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이 나거든 나를 본 것 여기소서.
경성에 혼자 남은 홍랑은 잊을 수 없는 연인 최경창을 찾아 서울로 올라와 첩을 자청하지만 이 일로 파직을 당하게 되자, 홍랑은 짧은 재회를 뒤로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두 번째 이별하게 된다. 그 후 최경창은 복직하나 평생을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가 선조 9년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명문가에 태어나 당대에 이름을 날린 문장가로서는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이다. 그러나 홍랑의 사랑은 계속된다. 최경창의 죽음을 알게 된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3년이 지났는데도 움막을 짓고 씻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으며 묘를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 어쩔 수 없이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이때 홍랑은 고죽 최경창이 남긴 시를 모두 정리해 고향으로 갖고 갔다. 조선시대 뛰어난 시인인 고죽의 시가 <고죽집>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홍랑의 사랑이 있었기 가능했다고 조선 중기 학자 남학명은 <회은집>에서 증언하고 있다.
홍랑이 죽고 난 뒤,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한 집안 사람으로 여겨 예를 갖춰 장사를 지냈고,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기생 홍랑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3번 헤어졌으나 마지막에는 연인 고죽의 곁에 머물게 되었다.(역사스페셜 발췌) 정리 현예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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