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불거진 창'
콩트
불 꺼진 창(최송림 작)
젊은 날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이브 밤, 그녀와 헤어져 혼자 술집순례를 하고 자취방에 돌아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나는 연탄불부터 갈아 넣고 빈방에 들어갔으나 전등은 켜지 않았다. 불 꺼진 창 밖에는 눈이 계속 하얗게 내린다. 저녁에 그녀와 만났던 대학로의 ‘마농’은 지난 가을 우리가 처음 만났던 찻집이기도 하다.
그날 모노드라마(1인극) 연극 한편을 보고 왠지 마음에 여운이 앙금처럼 남아 그것을 걷어내고 싶어 소극장 맞은편 이층 찻집을 무심코 들어서는데, “연극을 좋아하시나 보죠. 여기서 죽 지켜봤어요. 극장을 혼자 나서는 모습을…. 난 자신과 내기를 걸었죠. 마농에 올라와 커피를 마시면 오늘 멋진 행운이 깃든 거라구요.” 느닷없이 화들짝 반기는 낯선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찻잔을 들고 와서 마주 앉으며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여 인사하는 모습이 배우 뺨치게 예뻤다.
천성이 워낙 명랑 쾌활한가, 입가에 웃음이 잠시도 떠날 줄 몰랐다. 더군다나 마음의 창이라는 눈이 호수처럼 그렇게 맑고 깊을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나는 이 해가 지나면 불혹의 나이인데 아직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한 처량한 신세다. 고향인 양주에 뿌리를 내리고 농사꾼으로서 열심히 산 죄밖에 없건만, 도무지 시집오겠다는 여자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비장한 결심으로 서울 변두리하고도 수락산 자락에 허름한 연탄보일러 월세 방을 얻었다. 주말이면 서울에 올라와 특별시민으로 위장, 신부 찾기에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고나 할까? 연락처랍시고 시골 전화번호를 내밀었다간 연애조차 원천봉쇄, 영원히 총각신세를 면치 못할 것 같은 위기감—이 절박한 심정을 누가 아랴!
좌우지간 결혼식이라도 한 번 올려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런 후 신부가 속았다고 보따리를 싼들 어떠랴 싶은 배짱이다. 이번 마지막 시도조차 실패로 끝나면 조선족 처녀를 찾아서 중국 연변으로 원정 간다는 배수의 진까지 쳐놓았다.
나의 딱한 사정을 알고 하늘이 도왔을까, 가짜 회사원 행세를 하며 구차하게 서울거리를 배회한 지 채 한 달도 못 되어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그것도 낚싯밥조차 던지지 않았는데 걸려든 물고기(실례!)가 눈부시게 싱싱하다. 역시 서울물이 좋긴 좋구나! “첫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순박하달까, 아무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져요. 부인이 좋아하시겠네요?”
“부인이라뇨? 신토불이 무공해, 토종 총각입니다.” 아뿔싸! 이런 실수를… 나는 유머랍시고 한마디 던진다는 게 그만 처음부터 밑천을 이실직고하고야 말았다. 이 바보, 넌 서울의 회사원이야, 샐러리맨! “아유, 말씀이 어쩌면 그렇게 맛깔스러우실까? 재밌어라. 저도 혼잔걸요. 나는 농민후계자나 4H 청년회장 같은 농촌 분들이 좋더라.” “제가 바로 그 후계자, 회장 출신 아닙니까? 지금은 비록 명예회장이지만… 서울에 취직이 되는 바람에요.” 그렇지,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데! “첫눈에 알아봤어요. 흙냄새 묻어나는 그 감투만큼이나 두루두루 발도 넓겠네요?” 세상에 아직 이런 여자가 남아있었나,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솔직히 농사꾼이라고 말할 걸. 나는 감격한 나머지 그야말로 촌스럽게 “커피 한잔 더 하세요.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죠?” 딴은 프러포즈랍시라고 성급히 하자 그녀는 짜장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물론이죠. 언제든 삐삐만 주시면…” 기다렸다는 듯 얼른 메모지를 가방에서 꺼내 호출번호를 적어주었다. 나도 명함을 건네자, “아이, 멋져라! 양주에 농장도 다 있네요?” “농장이라기보다…” “놀러가고 싶어라! 언제 한번 데려가주실 건데요? 가을이 더 깊어버리기 전에 불러주세요, 네?” 그녀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어린애처럼 막무가내 떼를 썼다. ‘~라’하며 비음이 적당히 섞인 끝말투도 독특한 매력을 보탰다. 참말로 좋아하고 싶어라. 나는 아무래도 처음 만난 것 같지 않은 그녀를 두고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지레 불안하기 시작했다. 인연은 따로 있다더니 정말 짚신이 짝을 찾은 걸까…. 나는 예고 없이 불현듯 찾아온 이 기막힌 행운을 어떡해서든 동앗줄로 꽁꽁 묶어두고 싶었다.
아임 드리밍 오브 화이트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때마침 눈발이 히끗히끗 비친다. 나는 지정석인 양 즐겨 찾아 앉는 창가의 그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그녀가 나타나 선물(백화점에서 파는 국산품 중에서 최고급 화장품세트)을 받으며 기뻐할 모습을 유리창에 떠올려보았다. 거리에는 성탄절 기분에 들뜬 젊은이들의 물결이 넘실댄다. 저 눈이 그치기 전에 그녀가 빨리 왔으면 싶다. 젊은 연인들처럼 우리도 팔짱을 척 끼고 인파에 휩쓸리게 말이다.
오늘 같은 날 나와 단둘이 보낸다는 것은 그녀에게 딴 남자가 확실히 없다는 증거다. 나는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을 하리라. 그러고 새해 연휴 때 부모님께 소개시키겠다. 가능하다면 음력 세안이라도 결혼식을 올렸으면 좋겠다.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로 봐선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 같았다. 내가 농사꾼이라고 털어놓아도 말이다.
그때 그녀가 한 다발의 눈꽃처럼 입구 쪽에서 걸어 들어왔다. “어머나, 포장도 예뻐라. 뭐예요?” 그녀는 선물꾸러미를 보자 신이 나서 풀기 시작했다. “잠깐만, 먼저 영옥씨의 선물부터 받고 싶은데요.” “판호씨와 함께 나가 사려고 미처 준비를 못했는데, 어쩌나…” 영옥씨, 사랑합니다.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이런 상투어 말고 좀 더 멋진 말은 없을까? “제가 묻는 말에 ‘네’하고 대답만 하시면, 그것처럼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은 없을 겁니다.” “무조건요? 에이, 그런 엉터리가 어딨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어느새 선물꾸러미를 다 풀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후 그녀는 별안간 화를 내듯 소리를 질렀다. “내 이럴 줄 알고 미리 말하려고 했는데!” “왜, 마음에 안 드세요?” 나는 당황하여 그녀의 눈치를 살피느라 쩔쩔맸다. “다단계판매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암웨이나 뉴스킨같이 외국 화장품 ‧ 건강식품을 파는 다단계 말입니까?” “그것들 말고도 얼마든지 많아요. 물건이 얼마나 좋고 싼데요. 제가 디스트리뷰터 회원이잖아요? 제 밑에 회원으로 가입하세요. 판호씨도 밑에 또 회원을 두어 판매고만 높이면 엄청난 수입이… 판호씨는 마당발이니까 잘 할 거예요. 이 국산품은 산 데 가서 물리고, 제가 취급하는 제품을 도와주세요.” 그녀는 잽싸게 가방을 열더니 상품 샘플들을 내놓고 다단계판매의 이점을 훌륭한 말솜씨로 설명하느라 혼을 빼놓았다. “제가 외국상품 다단계판매원이라 실망했어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들 하나 데리고 먹고 살려니…” “옛? 혼잣몸이라 했잖아요? 노처녀…” “노(no) 처녀, 노 버진! 혼자 산다고 했지, 언제 노처녀라고 했어요? 이혼녀에요.” 쇠망치로 뒤통수를 타앙 맞은 기분이었다.
허허, 그럼 그렇지. 세상에 나를 좋아하는 처녀도 다 있을라고… 그녀는 애시당초 나를 다단계판매원 세포조직으로 삼기위해 계획적으로 접근했음이 분명했다. 나는 캄캄한 어둠속에서 왜 눈물이 자꾸만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진정한 나의 이브는 어디에 있을까? 눈물어린 내 눈에 갑자기 십자가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것은 내가 방금 갈아 넣은 연탄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굴뚝의 연기와 전봇대가 만나서 절묘하게 만들어낸 것이었다. 십자가 위로 허영옥의 천사 같은 얼굴이 눈송이를 타고 깔깔거리며 내려앉았다.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은 사실상의 첫사랑인데… 하지만 어느덧 그녀의 눈, 마음의 창엔 불빛이 꺼지고 어둠만 가득했다. 순간 눈보라가 불어 십자가가 흔들리는가했더니, ‘+’ 가 ‘× ’로 바꿨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지워졌다. 밤새도록 야속한 눈만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콩트 '불거진 창'
글/ 최송림, 작가,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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