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인 기황후, 원나라를 호령하다
조선 여인 기황후, 원나라를 호령하다
10월 28일, MBC-TV에서는 불의 여신 ‘정이’ 후속편으로 기(奇)황후 일대기를 그린 대하 드라마 ‘기황후’가 50부작으로 편성하고 첫 편이 방송됐다.
역사는 대원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기(奇) 황후를 고려 여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더구나 기황후는 단순한 황후의 자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황제와 버금가는 권력을 쥐고, 원나라 전체를 휘두르는 실권을 행사 했다. 중국역사에도 드문 일이다.
그렇다면 과연 기씨 여인은 어떻게 원나라로 건너갔을까? 몽고가 고려를 침입한 것은 1231년으로 고종18년이었다. 몽고와의 30여년 전쟁을 치루면서 치열한 항전을 벌렸으나 고려는 끝내 무릎을 끓고 만다. 이때부터 몽고의 원나라는 공주를 고려의 왕비로 내려 보내 내정간섭을 시작됐고, 원나라는 공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공녀란 ‘공물을 대신해 여자를 바치는 것이다’
행주 기씨 막내 딸인 기씨도 이때 공녀 신분으로 원나라로 가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기자오의 딸 기씨는 공녀가 되어 원나라 궁궐로 들어갔고, 차를 나르는 궁녀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때 원나라 태자 토곤데무르가 11세 때, 인천에서 4시간가량 배로 가면 볼 수 있는 대청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하다, 돌아가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데 이 사람이 원나라의 순제다.
어느 날 순제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기씨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궁궐내의 시기와 질투, 모반의 사건, 왕후책봉의 반대파 등장 등을 경험하면서도, 1337년 궁녀 기씨는 황제의 아들을 낳았고, 2년 후인 1339년에 원나라 황후가 됐다. 기황후가 원나라를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것은 30여년으로 추정한다. 1206년 징기스칸이 중국 통일과업을 시작했고, 1271년 손자 쿠빌라이칸에 의해 통일 됐다. 즉 쿠릴라이칸이 원제국 건설하고, 존속한 것이 100년으로 보면, 기황후의 30년 통치는 결과 적은 시간이 아니다.
원나라는 현재의 베이징을 수도로 삼았고, 이름을 대도(大都)라 칭했다. 기황후도 베이징의 자금성 건청문 자리에 황궁인 대명전을 세웠고, 사회 안정을 위한 인사를 개혁하고,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위해 대규모 구호사업를 추진하기도 했다. 또 후비열전의 기록을 보면 기황후는 ‘시간이 나면 여효경과 역사서를 보며, 역대 황후들의 덕행’에 대해 공부했고, ‘미모가 뛰어나고, 똑똑하고, 총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 기황후의 역사평가를 보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원나라를 미워한 고려의 역사가나, 원을 물리치고 새로운 제국을 건설한 명(明)나라의 역사가들은 부정적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힘없는 나라에 태어나 격동기를 거치면서 공녀로 끌려가 황후가 되어 대륙을 호령하던 한 조선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뒤돌아 보면 기황후의 역사적 평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편집부(역사스페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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