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디자인한 ‘조소앙’ 양주에 잠들다
북경기 역사의 중심, 양주문화 순례 (4)>
대한민국을 디자인한 ‘조소앙’ 양주에 잠들다
대한민국을 디자인한 ‘조소앙’ 양주에 잠들다
이번호 양주문화의 순례는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고 양주시 남면에 잠든 조소항 선생을 소개한다. 조소항 선생은 독립투사로 삼균주의를 주장하며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졌다. 역사책은 흔히 파주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는 양주 사람이다. 혼돈의 이유는 양주시 남면이 일제시대에는 파주로, 군정시대에는 연천군으로 분류되었다가 해방후 양주가 되었기에 생긴 것 같다.
함한 조씨인 조소앙 선생은 이름은 ‘용은’이요 호는 ‘소앙’이다. 1887년에 났다. 정3품 통정대부인 할아버지 성룡으로부터 한문을 익혀 열여섯에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3년 뒤 졸업하고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 동경 부립 제1중학을 거쳐 명치대학 법학부로 진학했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 시절 단재 신채호와 더불어 매국노 이하영 성토문을 뿌렸던 특기를 살려 대한흥학회를 조직하고 <대한흥학회보>의 주필로 활동했다.
1910년에는 경술국치성토문을 지었고, 1912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귀국, 경신학교, 양정의숙, 대동법률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이듬해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 39인의 공동서명으로 발표하였고 그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 부주석이 되었다. 대단한 문장의 선비이면서 붓대만 놀리지 않는 무골(武骨)이었던 듯하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열사는 그가 보냈으며 그의 열전을 지었다. 임시정부 수립에 즈음에서는 헌법, 의정원법을 기초하고 심사위원을 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 현재 우리나라의 국체와 정체 기틀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소앙 선생이 생각하는 독립운동은 ‘왕조를 다시 회복하자는 전근대적인 봉건국가를 세우자는 흐름에 종지부를 찍고 대한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대한민국 건설’을 주장했다. 한사람의 역할이 시대구분을 바꿔놓았다. 임시정부를 그 한 사람이 수립한 것은 아니나 그와 같은 전문적 법률지식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던 당시 조소앙 선생은 ‘머리’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외무부장, 교통부장으로서 만국평화회의, 국제 사회당대회에서 조선의 독립의지를 알렸고, 1929년에는 김구, 안창호, 이동녕, 이시영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나중에 부위원장이 되면서 유명한 삼균주의를 당 강령으로 확립하였다.
삼균주의는 정치의 균등, 경제의 균등, 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다. 그러나 당시 삼균주의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친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면서 정치, 교육의 균등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채택하지 않는 이상 경제 균등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소앙 선생은 삼균주의 실현을 촉구하며 남북통일을 위해 김구 선생과 함께 평양을 다녀왔고, 삼균주의 실현을 위해 사회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1950년 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전국 최다득표자가 되었으나 6·25전쟁의 와중에 북한으로 끌려가 최남선이 죽은 다음해 1958년쯤 돌아간 것으로 전해진다.
양주시 남면에 위치한 조소앙 선생의 가묘를 바라보며 작금의 우리 사회 가장 큰 화두는 복지와 분배로 역대정부 뿐만 아니라 박근혜정부에서도 경제민주화 실현을 정책의 최우선과제로 삼고 있다. 60여 년 전 조소앙 선생의 주장은 힘이 실리지 못했지만 사회복지의 효시를 이룬 선생이 새삼스럽게 민족의 선각자였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편집부(발췌/ ‘김성수의 양주문화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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