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인의 영원한 정신적 중심, ‘양주회암사지’
옛 양주권 순례-3
지난호 양주관아지에 이어 양주인의 영원한 정신적 중심지였던 ‘양주회암사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양주회암사지는 국도3호를 타고 의정부에서 동두천으로 가는 길에 양주시청을 지나 양주시 덕계동을 지나면 우회전 방향으로 가야 된다. 법적주소는 양주시 회암사길 11번지(율정동299-1)다. 이곳은 1997년 발굴을 시작하여 지금은 유적 연구 및 전시하는 전문박물관이 유적지 옆에 위치하고 있어 출토된 유물과 유적지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 대부분 큰 기대를 하고 오지 않다가 현장을 보면 왕궁 같은 규모에 놀라는 경우가 많다. 회암사지는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양주인 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민족의 지도정신을 견인했던 곳이다.
양주회암사지는 누가 언제 지었는지 모른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명종4년(1174년) 금나라 사신이 둘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 그 이전에 지어 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본격적인 기록은 154년 후인 고려 충숙왕 15년(1328년)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회암사를 지었다. 조선 전기 이색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년)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절이 불태워졌다. 이 절이 있던 자리에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지금의 회암사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중요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를 비롯하여, 지공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49호)·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나옹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51호)·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유형문화재 제52호)·어사대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82호)·맷돌(경기도민속자료 제1호)과 당간지주, 건물의 초석들이 남아있다. 이 사찰은 평지가 아닌 산간지방에 위치하면서도 평지에 있는 절에서 볼 수 있는 남회랑을 만든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입장료는 어린이 1,000원, 어른 2,000원으로 개장시간은 오전 9시부터 5시까지며 3월 1일부터는 6시까지다. 현예리 시민기자
양주인의 영원한 정신적 중심, ‘양주회암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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