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자의반 타의반 독일 보쿰 인형극 학교의 초청으로 독일로 건너간 그는 보쿰을 시작으로 독일 전역을 순회 공연한다. 탈춤 공연과 강연 전시를 통하여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전하였고 마침내 베를린(Berlin)에 정착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인 극단 테아트로무 < Teatro Mu >를 설립하고 자신이 만든 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마음껏 공연하게 된다.
그곳에서 독일, 프랑스, 폴란드 등 유럽의 젊은 연기자들과 함께 Todes leben(살았어도 죽은 사람들), Anschlag bei nacht(밤의 충격), Bitte libe mich(나를 사랑해 주세요), Look RYE(禮 봐라)등 초현실주의 실험 연극을 연이어 공연하여 서방 세계를 흔들어 놓는다.
1982년 민주 탄압과 군사독재의 횡포로 암울하던 그해, 그는 잠시 귀국하여 당시 상황을 맹렬히 비판한 작품 <통. 막. 살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 공연한다.
반 이데올로기, 반 테크놀로지, 반연극을 통한 전위적이었던 <통. 막. 살>은 거침없는 비판과 고통과 잔혹의 표현으로 당시 이 사회에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
그 후에도 공연 사전 검열이라는 국가 기관의 시퍼런 눈독을 뿌리치며 거침없이 담대하고 활기차게 온갖 난관을 극복하며 공포와 잔혹의 이름으로 체제와 충돌하고 그릇된 역사에 반기를 들며 < 통. 막. 살> < 民喪家> < 知봐라 돈 놔라 > <역사의 후퇴> <막베어> <정오의 살인법> < 검은 넋> < 통. 피. 살 > <상하좌우> < 못생긴 美女> 등 전위 예술 작품으로 우리 시대를 진단하고 도전하였던 것이다. 1984년 그는 모든 독일 활동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 무세중의 도극 사상(道劇思想)
그의 도극 사상(道劇思想)은 항상 이기적으로 움츠려 드는 자기 벽을 깨고(파. 破), 항상 생존하는 까닭을 깨닫고(각. 覺), 항상 마음을 비우고 새로움으로 진작하기 위하여 깨우치는(교. 敎) 인도(人道)의 회복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얼빛 (눈빛, 얼굴빛, 몸빛등 육체로 발산되는 빛), 새로운 넋소리(육체 속에서 부딪쳐 나오는 소리 :목소리, 뼈소리, 살소리, 피소리), 새로운 몸짓의 정기(精氣)를 일깨워 인간 내면에 잠재하는 신비함 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도극(道劇)을 창출한다. 무세중의 전위 미학은 굿에서 시작되어 전위에서 마감된다.
그의 전위굿의 포용성은 한민족을 모든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지킬 수 있게 하는 위대한 저력이며, 언제나 굿과 함께 하는 놀이는 삶의 안목을 넓혀 비판적이고 연극적인 극복성으로 밑바탕을 다지고 동족과 연대하여 포용의 벌림과 극복 의지가 가득한 디딤의 굳건한 자세로 서로 상응하고 상생해온 미덕을 갖추고 있다.
바로 그 전위굿이 현실 인식의 상황굿에서 현실 투쟁의 난장 굿을 통해서 달성하며 굿의 목적인 해원과 구원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또한 그의 전위굿은 사람 중심 문화의 핵으로 자리 잡고 인간과 자연 , 인간과 인간의 영속적인 소통을 꾀하여 삶을 신명나게 하며 인간들을 얼싸안게 하는 대동의 신성한 자리 마당을 마련하고 자연과 인간이 일체가 되게 한다.
2003년 간암 말기 선고 후 죽음의 사투 속에서 간 절제 수술을 받았던 그는 불굴의 투지와 의지력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있으며 자신의 남은 모든 삶을 도극(道劇)에 정진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국내외에서 매 공연마다 많은 반향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지금까지 500 여 편의 작품을 무대에서 공연 하였다.
올해 나이 75세인 고령에도 불구하고 평생의 반려자이며 공연 파트너인 무나미와 함께 지금도 여전히 왕성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무세중은 영원히 젊은 예술 전사이며 항상 앞 시대의 문화를 모색해 나가는 전위주의자이며 詩人, 퍼포밍 아나키스트, 광대, 난장(亂場)굿쟁이, 행동 예술가이다.
정리/현성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