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통행금지
1982년 1월 5일, 해방 이후 37년 만에 풀어져
7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필자는 밤 10시 정각에 라디오에서 시그널 뮤직과 함께 흘러나오는 “청소년 여러분 이제 밤이 깊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라는 멘트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마치 청소년들이 밤 10시 넘어 거리를 다니면 나쁜 짓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통행금지라는 거대한 사회적 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의 통행권을 다시 부여받아
이처럼 해방 이후에 생긴 야간통행금지는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 사령관 존 R. 하지(John R. Hodge) 중장이 치안 유지의 명목으로 서울과 인천의 야간통행을 금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야간통행금지는 국가안보를 이유로 지속되었으며, 1954년 4월에는 대상지역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통행이 금지되었다.
1961년에는 통행금지 시간이 자정에서 새벽 4시로 축소되었으며, 1964년 제주도, 1965년 충청북도가 통행금지 대상지역에서 제외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야간통행금지 제도는 계속 유지되었다.
물론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 자정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와 12월 31일 자정부터 새해 첫날 오전4시까지는 야간통행 금지가 일시 해제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베이비’라는 말도 생길 정도로 그 당시 청춘들에게는 ‘해방구’였었다.
이 같은 야간통행금지는 그1982년에 와서 겨우 해제되었다. 1982년 새해는 그 시작과 함께 굵직굵직한 뉴스가 연일 터져 나왔다. 먼저 1월 2일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중·고등학생의 복장과 두발이 전면 자율화되었고, 다음날에는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부처의 개각이 단행됐다.
그리고 1월 5일,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해방 이후 37년간 규제 속에 묶여 있던 야간통행금지를 이날 자정을 기해 전격 해제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시민들은 광복 직후 미군정에 의해 제한됐던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의 통행권을 다시 부여받게 되었다.
외국인도 신기했던 야간통행금지
얼마 전 모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예전 방송국 이야기를 하던 중견배우 K(배우의 인격을 위해 이니셜로 표기함)씨는 “당시 통행금지 덕(?)에 결혼한 부부들 내 주위에 꽤 많아요. 허! 허! 가까운 인천에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함께 같다가 아이고! 통행 때문에 집에 갈수가 없네 하면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그리고는 아~ 그만 끝!”하면서 좌중을 웃긴 적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이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겠지만 당시에는 심각한(?) 사회문제, 가정문제이기도 했었다.
74년 홍익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던 박문경(58세 서양화가)씨는 “대학 다닐 때 몇 몇 친구들과 함께 아르바이트로 겨울방학에 땅콩장사를 시작했는데 이대입구 신영극장 앞에 손수레에서 땅콩을 팔았는데 이상하게도 통금이 임박한 시간에 땅콩이 많이 팔렸다.
그러다 보니 종종 통금시간을 넘겼다. 당시 통금 위반 벌금은 꽤 많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우리는 통금사이렌이 울리기 직전에 아예 손수레를 끌고 근처에 있는 파출소를 찾아가서 파출소를 청소하고 경찰과 방범대원들을 위해 커피나 라면을 끊이면서 통금을 피했다”라며 당시를 회고 했다.
어디 이 것 뿐이겠는가. 야간 통행금지 관계로 TV는 오전 7시에서 10시 사이, 오후 5시에서 11시 30분 사이 등 9시간 30분에 방송을 마무리했으며, 라디오 FM방송은 자정, AM방송은 새벽 1시까지 전파를 탈 수 있었다.
그리고 항공기 운항시간도 우리나라(김포, 김해공항)에 착륙을 못하고 새벽 늦게 도착하면 일본이나 대만, 홍콩, 알래스카, 하와이 등지로 회항한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중화권 배우이면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영화배우 성룡도 우리나라의 통행금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 영화 홍보 차 한국을 방문한 그는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제게 정말 특별한 나라예요. 특히 어렸을 때 한국에서 여자 친구와 경험했던 통행금지의 추억을 잊을 수 없어요"라며 "'통금'이라는 것이 있던 때라, 그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며 독특한 한국에서의 기억을 털어 놓기도 했었다.
12시 넘어 다니면 마치 간첩이라도 된 줄 알았던 시절
통행금지 하면 빠뜨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야경꾼이다. 야경꾼은 경찰 보조인 방범대원 이생기기 전 일 이다. 야경꾼 역시 경찰 보조역 이었다.
야간통행금지가 시작된 당시에 야경꾼들은 지역 유지들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처음 야경꾼의 순찰근무는 닷새에 한 번 꼴로 돌아왔다고 한다. 비록 사법권이 없었지만 서로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주민들이었기에 협조적이었다.
전쟁 직후의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밤에 간간이 울리는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에 주민들은 편하게 잠을 청 할 수 있었다. 밤이 이슥해지면 찹쌀떡과 메밀묵 파는 장사꾼의 목소리가 골목 골목 울려 퍼졌다.
그러다가 밤 10시가 되면 찹쌀떡 장수의 소리는 끊기고 야경꾼들이 울리는 딱딱이 소리가 조용한 밤거리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야경꾼의 작은 막대 두개로 박수치는 형태로 “딱딱”소리를 내면서 동네를 순찰하면서 내는 소리가 통행금지가 시작되었으니 위반자들은 알아서 숨으라는 신호와 같았다. 참 인간적인 모습들이었다.
야간통행금지는 당시 우리 사회에 많은 부작용을 낳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와 안보라는 국가적 이슈에 국민들은 그저 묵묵히 당하고만 있었다.
물론 전두환 정권 때 해제된 이유 역시 국민들의 정치적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한 또 다른 고도의 정치적 ‘쇼’였다. 두발 자유화, 교복 자율화, 프로스포츠 창설 등 전두환 정권은 자유, 자율을 주는듯 하면서 국민들을 교묘하게 정치에서 비켜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쨌듯 30여 년 전 사라진 야간통행금지를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모 은행에 근무했던 최희수(당시 26세 무직)씨는 “처음 통금이 해제되던 날, 별로 할 일도 없으면서 객기로 일부러 술을 마시고 밤새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과연 새벽 2시 종로에서는 무슨 일들이 일어날까? 바로 어제까지 사람들이 다니지 못했던 을지로 입구는 어떤 모습일까? 12시 넘어 다니면 마치 간첩이라도 된 줄 알았던 어제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그저 그랬어요”라며 그 때를 회상했다.
이른바 ‘야통’이 있었던 그 시절. 밤 11시 이후가 되면 막차와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야단법석이었고, 상가나 술집들도 밤 11시30분 이전에는 반드시 문을 닫았다.
하지만 통금해제 이후 버스와 지하철은 당연한 것처럼 자정 넘어 운행했고, 택시도 철야로 다녔다. 심야영업 간판을 내건 가게들도 속속 등장했었다. 그러나 시민생활은 그리 큰 동요가 없었다. 서울시내의 도심이나 변두리 할 것 없이 ‘야통’시점과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어쨌든 밤 12시가 되면 어김없이 울러 퍼지는 사이렌 소리, 그리고 쫓고 쫓기는 경찰과 통금위반자들의 모습은 옛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참!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야간통행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