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의 삶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생활을 설계해봅니다. 작년 말 잠시 전쟁의 불안감을 안고 살기는 했지만, 일상에서는 몹시 평화롭고 무척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낸 한 해였습니다. 먼저 평화로운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들판 가운데 집을 지어 아름다운 공원을 앞뜰로 삼으며 커다란 호수를 눈에 담고 살아가는 재미를 어찌 글로 형언할 수 있을까요. 동네에서 산 넘어 2km 정도 떨어진 외딴집이라 낮에도 혼자 있기 무섭다는 아내 때문에 홀로 외출하면 해가 지기 전에 귀가해야 하는 게 다소 고통스러울 때가 있긴 하지만, 밖에 나돌아 다니길 좋아하지 않는 저에게 큰 불편은 아니지요.
지난 봄 집 주위 논에 모내기하는 농부가 물이 부족하다기에 제 집 지하수를 끌어다 쓰라고 했더니 가을걷이를 끝내고 쌀 한 말을 가져왔더군요. 여름에 굵은 땀방울을 쏟아내는 농사꾼에게 좀 쉬고 일하라며 시원한 물 한잔 건넸더니 가을에 양파 한 꾸러미를 들고 왔고요. 아무리 물 값을 곱빼기로 비싸게 치거나 속된 말로 따따블로 계산하더라도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셈이랄까요.
농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어도 농사를 지을 줄 몰라 적지 않은 텃밭을 놀렸는데, 산 넘어 동네 사람들은 흉을 보기는커녕 덕을 베풀어 주더군요. 뒤뜰에 호박이 많이 열렸다며 따오는 이웃, 산자락 밭에 고구마 농사를 잘 지었다며 가져오는 이웃, 오일장에 가져가 팔고 남았다며 봄동이나 파를 갖다 주는 이웃, 너른 마당에 닭을 많이 키운다며 유정란을 매주 한 꾸러미씩 갖다 먹으라는 이웃, 김장 담글 줄 모를 테니 자기네 김장할 때 옆에 서있기만 해도 20-30 포기는 거저 주겠다는 이웃 ……. 공기 맑고 경치 좋은 곳에 사는 것도 커다란 복인데 이렇게 정겨운 이웃까지 넘쳐나니 그야말로 낙원이나 천국의 생활이 이보다 평화로울 수 있을까요?
지난해엔 집 자랑할 겸 가까이 지내온 사람들을 집으로 많이 불렀습니다. 집이 좋은 게 아니라 자리가 좋은 것이니 정확하게 말하면 집터를 자랑하기 위해서였지요. 아무튼 지금까지 수백 명이 아니라면 아무리 적어도 백수십 명은 다녀간 것 같습니다.
이런 가운데 집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초청할 때마다 아내와 갈등이 생기곤 합니다. 10-20명의 손님을 치르려면 아내는 시내 대형 슈퍼마켓에서 장보기를 원하거든요. 동네 농협 마트보다 물건이 다양하고 값이 싸다는 이유지요. 저는 농촌에 살면서 농협 마트를 이용하는 게 일종의 의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만. 또한 아내는 일회용 접시와 젓가락 등을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도와준다고 해도 설거지하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친환경용’으로 잘 씻어서 몇 번 더 쓸 수 있는 플라스틱 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궁상떠는 것 같다고 싫어하고요. 참고로 미국에서는 대개 음식물 찌꺼기는 개수대에서 갈아버리고 모든 생활쓰레기는 전혀 분리하지 않은 채 산더미로 버리는데, 아내는 그런 미국 생활 속에 30여년이나 빠져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와 전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저와의 갈등이 금세 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이른바 진보주의자로 자처하고 ‘모두 함께 더불어 사는 평화 세상’을 꿈꾸면서도 이에 어긋나는 짓을 저지를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청소차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묻을 것은 묻고 태울 것은 태우면서 쓰레기를 일일이 분리하기 귀찮아 비닐류까지 태워버리는 경우가 있지요. 마당의 쓰레기는 눈에 띌 때마다 주우면서 뒷산에 오르면서 눈에 들어오는 쓰레기는 외면하기 일쑤였습니다.
집에서 밥 먹을 때는 휴지 1-2장만 쓰면서도 음식점에서는 3-4장을 쓰는 자신을 종종 발견하기도 하고요. 집안의 옷장이나 화장실을 나오며 전등 끄는 것을 잊어버렸을 때는 천금이라도 잃어버린 것처럼 아까워하면서도, 직장의 제 연구실이나 빈 강의실에서 새나가는 전기에 대해서는 가슴 아프게 느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새해에도 집터 자랑은 계속될 텐데 여러 사람을 부르더라도 농협 마트에서 장보고 일회용품은 되도록 쓰지 않으렵니다. 쓰레기 처리를 제대로 하고 공공용품이나 남의 물건을 내 물건처럼 아껴 쓰는 버릇을 붙이렵니다.
아울러 보다 넓은 마음과 더욱 뜨거운 가슴을 지녀야겠다는 다짐도 갖게 됩니다.
직장에서 돈과 자리를 좇아 동료들을 짓밟는 사람들이나 사회에서 평화/통일운동을 벌이는데 생각이나 이념이 너무 크게 다른 사람들에겐 경멸하거나 적대감까지 가져왔는데 그들도 품을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쓰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주로 머리를 크게 하는 글만 읽어왔지만, 앞으로는 마음을 넓게 하고 가슴을 뜨겁게 하는 글도 함께 접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워봅니다. 마침 ‘경’을 읽어보라는 선배 교수의 충고에 따라 책상 위에 도덕경, 성경, 불경 등을 이미 놓아두었지요.
나아가 한 가지 더 큰 소망을 품어봅니다. 작년엔 네 차례나 서울과 부산의 법정에 섰습니다. 평화/통일운동을 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 시민운동가, 교사, 목사 등을 변호하기 위해 소위 ‘전문가 증인’으로 기꺼이 나섰지요. 증언할 때마다 자신만 잘 살겠다는 이기심을 버리고 남과 북이 더불어 평화적으로 살아야 한다며 자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 분들이 대우를 받기는커녕 처벌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새해엔 전라도 산골에 사는 사람이 대처로 나가 법정에서 증언하는 일이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제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와 나라 안팎에서도 평화를 맘껏 누릴 수 있는 나날을 맞이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교수, 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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