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비결 저자 ‘이지함’
조선의 괴짜 선비들(1)
토정비결 저자 ‘이지함’
나는 최근 수년 간 조선의 야사에 관한 원고를 몇 권 썼다. 그러자니 당연히 선인들이 남김 자료들을 뒤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매우 재미있는 내용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꿰뚫는 선조들의 재치와 지혜를 엿보며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기발한 착상과 여유 있는 유머에 공감하는 선비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철모를 쓰고 다닌 토정 이지함>
이토정(李土亭)은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다. 요즘도 음력 정월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일 년 신수가 쓰여 있는 이지함의 토정비결을 본다. 토정은 조선 11대인 중종대왕 12년에 한산 이씨 가문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지함이고 토정은 별호로 이지함은 고려의 거목 목은 이색의 6대 손으로 이치의 아들이다. 가문으로 보아 그가 영달을 꾀했다면 일개 현감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천재적인 재질과 뛰어난 두뇌로 능히 한 세상을 주름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공명과 부귀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별호가 말해 주듯 흙을 쌓아서 정자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한 평생을 살았으니 이것만 보아도 기이한 인물이다. 백여 척이나 되는 높이의 토정을 만포에 만들어 놓고 스스로 토정이라 칭하며 토정 위에서 태평하게 세월을 보냈다. 이따금 사람들이 “토정살이가 어떠한가? 재미는 있는가?”하고 물으면 ”온 세상이 다 근심 걱정 투성이지만 토정살이는 홀로 평안하고, 온 세상이 모두 시시 분분하지만 토정살이는 홀로 평화롭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동정심 많은 이지함>
토정은 어려서부터 동정심이 많았다. 그는 형님의 지번을 따라 당시 유명한 유학자인 모산수의 문하에 다니며 공부했는데 학문이 일취월장 했을 뿐 아니라 성실했다. 어느 날 서당 갔던 그가 도포를 입지 않고 적삼차림으로 귀가했다. 이상하게 여긴 어머니가 어찌했냐고 물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집으로 돌아오다가 보니 홍제교 아래에 거지 아이들 세 놈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추운 날 벌벌 떨고 있어 도포를 세 조각으로 나눠 세 아이들의 살을 가려 주고 왔지요”라고 답했다.
<아성 이지함>
토정은 방랑하는 동안 제주도를 제일 많이 찾았다. 특히 제주 목사는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특별대우 했다. 그것은 토정의 조카들이 현직 판서다, 영의정이다 하면서 쩡쩡 울리는 가문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제주목사가 토정을 대접할 겸, 여색에 대한 그의 지조를 시험해 보고자 제주도에서 첫째가는 미색의 ‘옥주’라는 기생으로 하여금 수청 들게 하였다. 촛불이 휘황한 토정 선생 방에는 옥주가 그린 듯이 앉아 있었으나 그는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옥주는 다음날 전후 사정을 목사에게 고하자 제주목사는 “과연 토정은 아성(성인에 버금간다는 뜻)이로군”이라며 무릎을 쳤다.
<임진왜란을 예언한 이지함>
그는 말년에 무슨 생각이었던지 그토록 싫어하던 벼슬을 했다. 포천 현감으로 있다. 아산 현감으로 전임되었다. 수령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명망이 조정에까지 전달 됐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로 죽게 된다. 토정은 매일 같이 지네 즙을 먹고 그 독을 제하기 위해 생밤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토정이 지네 즙을 먹은 다음 늙은 아전이 생밤을 주지 않아 토정은 죽고 만다. 그가 지네 즙을 매일 먹는 것은 이십여년 더 살아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함이었다. 하늘은 그에게 수명을 더 주지 않았다. 토정비결은 조선시대의 학자 이지함이 쓴 예언서로 토정은 지함의 호이고 비결은 사람의 길흉화복을 적어 놓은 책이란 뜻이다. 조선 후기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진 뒤 지금까지 운세를 점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본고는 ‘조선의 괴짜 선비들’에서 발췌했다.
글/ 김영진(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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