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삼가 고 박정희, 김재규의 명복을 빕니다”
기자수첩/ 10. 26 40주기를 맞이하여
<<“삼가 고 박정희, 김재규의 명복을 빕니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만주국 만주군 장교가 있었다. 나중에 그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다카키 마사오’는 1940년 만주국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42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했으며 1944년에 만주국 만주군 장교로 부임하면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을 체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우렸다. 그리고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그는 만주국 당국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젊은 날의 초상이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1917년 11월 14일 경북 구미에서 태어난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국군 창설에 참가하여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구에서 일어난 10.1폭동 때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가 경찰의 총에 사망하자, 형을 존경하며 따랐던 그는 분노하게 된다.
이를 노린 당시 목사이자 남로당 군사 총책이였던 이재복은 박정희를 포섭하여 박정희에게 남로당 가입을 권유하였고, 곧 박정희는 남로당의 군 조직에 가입하였으나 체포되었고 사형에서 무기징역, 그리고 10년 선고를 받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석방되어 국방부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발자취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정치를 시작하였다.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제5, 6, 7, 8, 9대 대통령으로 장기집권을 하였다.
그는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등 조국 근대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그러나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궤변을 앞세워 18년 동안 독재정치로 우리나라를 통치했다.
김재규는 1926년 3월 6일 생으로 해방 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향인 그는 1954년 육군 제5사단 36연대장을 거쳐 육군 제101연대장을 지냈고, 1956년 육군 준장 진급, 1957년 육군대학교 부총장을 지냈으나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나 군사정부에 적극 협조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친했던 그가 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했을까? 그는 자신의 유언에서 “나의 희생은 민주주의의 회복이었다”그리고 이어 “박 대통령 각하는 동향 출신으로, 나에게 은인이며 상관이다. 친형제 간도 그럴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관계다.
그러나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통령 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라고 밝혔다. 그래서 지금의 학자들은 김재규의 죽음을 희생이라고 평가하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한 열사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이 두 사람은 서로가 희생자이기도 하면서 가해자이기도 하다. 어쨌든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만세! 세상을 하직하고 가면서 자유민주주의 회복 보지 않고 가니 한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 기약되었으니 웃으며 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소신에 의한 행동이니 그에 알맞은 형벌을 내려 주십시오. 끝으로 나의 부하들은 착하고 순한 양 같은 사람들입니다. 무조건 복종했고 선택의 여유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라며 최후 진술을 마쳤다. 2019년 10, 26을 맞이하면서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했던 사건을 훗날 역사가는 어떻게 평가 할까? 다시 기억하면서 “삼가 두 분의 명복을 빕니다”
글/ 현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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