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권력과 대선
문화권력과 대선
한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제안된 삼권분립의 원칙은 근대 이후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많은 국가들에 최선의 선택으로 자리 잡아 왔다. 최근 한국 사회에는 이러한 권력과 더불어 제4의 권력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제4의 권력은 앞의 세 권력 주체처럼 명백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문화 권력의 실체이다. 문화 권력이란 크게는 세계적 차원에서나 특정 사회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가진다. 좁게는 냉전이데올로기의 경우처럼 특정한 사유 패턴에 의한 사물 파악 방식에 제한되기도 하지만, 넓게는 한 사회를 구성하는 이념 틀로 자리 잡아서 자주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의식되지 못하여 쉽게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지속적으로 많이 버는 것이 좋은 것이고, 이것이 곳 행복과 연결된다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스타나 성공한 CEO에 의한 광고 전략은 소비자들에게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그래서 소비자들에게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서 현실을 망각한다. 대중매체를 통해 문화 권력의 이데올로그들은 종말론 자들처럼 모든 현실을 유토피아적인 저편에 대한 상상 하도록 하여 현실의 다양한 가치들을 추상화하여 왜곡시킨다. 대중들을 허위의식에 놀아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그러면 대중들은 유토피아를 실현시켜줄 메시아를 특정한 정치가의 이미지와 결합시켜 특정한 정당후보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비자본주의에 중독된 시민들에게 지지를 얻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집단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특정한 시기에 잠시 나타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한 다음, 그 대중들의 심리를 이용해 새로운 의제를 설정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을 지지하도록 유도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생하는 문화 권력자들이다. 선거철에 등장하는 선거참모와 기존의 미디어 권력은 특정한 시기에 서로 도와가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누구를 내세울 것인가가 결정이 되면, 그에 따라 두 가지의 범주로 이미지를 편집해 낸다. 자신에게 유리한 이미지와 유리하지 않은 이미지를 선별해 내고,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들을 이러한 구도아래서 보도록 대중들의 의식을 서서히 잠식해 간다. 이러한 구도에서 볼 때, 현재의 기사를 보노라면 아마도 향후 대선의 규칙은 “독재자의 딸 vs. 종북 좌파”의 대결구도도 돌아갈 것 같은 조심이 느껴진다. 전자는 이른바 민주화 세대와 그 지지층들을 결집시킬 키 워드(Key word)가 될 듯 하고, 후자는 보수층을 결집시킬 유리한 코드가 될 것이다. 여기에 약간의 네커티브와 그 때 그 때 필요한 폭로전으로 두 독재자 사이를 오가는 부동(浮動)의 지지층을 흡수하려 할 것이다.
안철수는 최근 부산대 강연에서 오랜 이 두 선거 전략의 구태에 주목하면서 정치의 실종을 우려하고 있다. 이 두 구태를 극복할 수 있는 안철수 대안이 힘을 얻을지 관심이 주목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그가 문화 권력의 이데올로그(Ideolog)들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관심의 대상이다. 만약 그가 성공한다면 한국 사회를 오래 동안 지배해 왔던 두 ‘거대 담론: 독재자의 딸과 종복좌파의 메카시즘’이 해체되는 기폭제가 될지도 모른다. 해체론의 시대라고 했던가? 새로운 의제 설정으로 기존의 ‘거대 담론’이 해체되는 사태를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글/ 서기원(본지 논설위원, 의정부 의료원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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