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조상 의 숲 가꾸기 1000년 대계
조상의 숲 가꾸기 1000년 대계
우리 조상은 참으로 위대하다. 광릉(光陵)에는 조선의 7대 임금 세조의 능이 있는 천년 숲의 수목원이 있다. 세조는 자신의 무덤을 만들 때 풍수가 좋은 양지바른 곳에 하고 병풍석은 간편한 난간석으로 하라고 했다. 또한 주변에 많은 나무를 심고 가꾸어 수목원을 만들라고 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국장이 이루어지면 5개월 동안 능역을 조성하여 장례를 치른다. 장지가 선정되면 봉분에서 보이는 개인의 무덤과 집은 이전을 해야 하고, 한 그루의 나무라도 함부로 베면 큰일 났다. 이렇게 만든 게 광릉 숲과 홍릉 숲이다.
왕권을 장악한 태종은 계모 신덕왕후릉인 정릉(貞陵)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면서 도성을 중심으로 4km 이내에 묘역 조성을 금했다. 조선의 능역은 도성 10리 밖 풍수적 길지에 집중적으로 조성됐다. 이후 왕의 친행 시 환궁을 고려하여 도성 100리 이내에 능역을 조성하는 원칙을 정한다. 대한제국시대 조선 왕릉의 규모는 수천만 m²에 이르는 거대한 숲이었으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면적이 불에 타고 공공기관이 점유하게 되었다. 1408년에 조성된 태조의 건원릉 건설은 박자청이 도성과 궁궐, 종묘 그리고 왕릉을 조성한 당시 최고의 건설 본부장이었다. 왕릉 조성은 최고의 풍수가, 건설가, 조각가를 동원해 온갖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그래서 왕릉은 시대의 철학, 사상, 기술을 이해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조선의 왕릉은 속세에서의 고단함을 잊고 편안히 쉬는 공간으로 꾸몄다. 언덕의 양지바른 곳에 석물과 회벽실을 만들어 잔디로 피복하여 아름다움을 더했다. 선왕의 혼백이 능역에 나와 노시기를 바라 혼유석을 능침 앞의 북 모양의 돌 위에 올려놓았다.
조선시대 능원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공간으로 조성했고, 돌아가신 선왕은 산언덕을, 현세의 왕은 언덕 아래 평지를 이용했다. 제례 시 선왕은 능상의 언덕에서 내려와 정자각에서 현세의 왕과 만나게 했다. 능원은 정자각을 중심으로 3단계의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재실 등이 있는 진입공간은 산 자의 공간이고,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을 중심으로 한 곳은 선왕과 현세의 왕이 만나는 성과 속의 공간인 제향공간이다.
능역의 진입은 명당수가 흐르는 개천을 따라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진입하게 해 능원의 신비감을 더해 주었다. 능역 입구의 연못은 풍수적 합수지이면서 참배자의 마음을 씻는 공간이다.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제례에 임한다는 뜻이다.
조선왕릉은 우리 민족 제례문화공간의 결정체로서 세계유산대회사상 유례가 없는 호평을 받아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됐다. 앞으로 훼손된 능제시설을 복원하고 세계인이 함께 보존하고 향유할 문화공간으로 관리해야 하겠다. 세계문화유산등재는 1000년 후 서울의 도심 속에 2000년 된 역사경관 숲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1000년을 내다보고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는 조상의 안목과 지혜는 슬기로웠다. 우리도 우리 후손을 위해 산 사랑, 숲 사랑을 하여 살기 좋고 아름다운 강산을 물려줘야 한다. 박태원(본지논설위원, 호원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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