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신은 과연 텅 빈 기표일까?
어떤 사람은 노무현의 실정에 주목하면서 현재 진보연합을 외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노무현 정신’은 텅 빈 기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노무현의 모습은 이렇다.
3당 통합 때 “이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청문회 때 모르쇠로 일관하던 전두환을 향해 자신의 명패를 던지던 사람, 부산 사람으로서 전라도에서 출마하여 실패를 한 사람, 그리고 문화 권력으로 변한 신문의 횡포에 맞서 굴하지 않았던 사람, 상식이 통하는 사회,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이른바 한국 사회의 ‘주인’들에게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려고 했던 사람이다. 물론 그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여러 가지 실정도 없지 않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살아온 삶의 태도다. 그의 삶의 여정을 스스로 학력과 지연으로 뭉쳐 스스로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던 기득권층의 이념적 지형에서 바라보면 노무현은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다. 한국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출세를 하려면 지역적 기반이 튼튼하거나 최고의 명문 대학을 나오거나 이른바 사회자본이 튼튼하여 인맥관계가 탄탄하거나 하는 몇 가지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아닌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모두가 기존의 사회질서에 순응해서 안락한 삶을 선택하는 이 시대에 그는 언제나 ‘아니오.’하는 비판정신으로 살았다.
그래서 그는 ‘바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 이 대목에서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노동 운동을 하려고 할 때, 아버지를 비롯하여 모두가 하지 말라고 말리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모임을 ‘바보회’라고 이름 지은 것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 두 사람은 정당하게 시민으로서의 개인의 권리를 주장했음에도 이를 회피하려는 다수에 의해 ‘바보’로 불린다.
우리 사회는 아직 개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기주의와도 구별되고 당파주의 혹은 파벌주의와도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진정한 개인주의를 실천하는 지식인도 그다지 많지 않다. 사실 개인주의라는 개념은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토크빌의 개념으로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근대화를 주장했던 지식인들이 자주 논의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근대를 훌쩍 뛰어넘은 현대 현재 한국시민사회에서도 개인의 권리 논의는 아직까지도 묘연한 문제다. 아직도 한국 사회는 인연에 따른 파벌주의와 붕당주의가 판을 치고 있어서 확실한 배경이나 연고가 없으면 개인의 인권이나 권리는 무시되는 사회인 것이다. 즉 시민 개인의 개인주의에 입각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인 것이다.
나는 최근에 이러한 개인주의적 인격의 소유자에 가까운 인물들로 다음의 사람들을 예로 들고 싶다. 안철수, 박경철, 김예슬, 진중권, 강의석, 류상태 등등. 당당하게 이 사회를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야 말로 지연과 혈연으로 강고하게 뭉쳐진 한국 사회의 문법을 해체시킬 수 있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한국 사회는 그 사회적 정치적 후진성에서 벗어나 비로소 문명사회로 진일보하게 될 것이다. 나는 노무현의 “아니오.“ 혹은 ”이의 있습니다.“ 정신을 그의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주의 성숙을 위한 기표로 이해하고 싶다.
노무현의 정신은 이른바 진보의 연합을 꿈꾸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진보정당의 통합에 있지 않다. 보다 근본적으로 시민 개인의 정신의 신장에 있다.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재판(再版)격인 현재 한국의 정당정치에 희망을 걸지 말자. 지금까지 우리는 그들의 공약(公約)이 공약(空約)되는 반복을 수없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그들에게는 개인주의도 없고, 신뢰도 없을뿐더러 그들을 성숙시켜 줄 치열한 경쟁상대도 없다.
니일 앤더슨은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에서 서양 문명이 수준 높은 문명을 구가해왔던 세계 여러 나라들을 단번에 넘어설 수 있었던 계기로 언급한 6가지 가운데 서양의 근대 과학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근대 과학의 핵심 정신은 바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아니오.‘의 정신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관찰과 증명에 입각하여 확신에 찬 어조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지배적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적 세계관에 ’아니오‘라고 외쳤을 때 근대과학의 여명이 열리게 된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아닌 것은 “아니오.” 라고 말하는 개인주의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사회를 감싸고 있는 봉건주의적 씨족 논리와 문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틈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숙한 개인들의 정치참여가 중요하다. ‘노무현 정신’은 결코 텅 빈 기표가 아니다. 오늘 우리의 정치가 ‘근대화’로 가는데 필수불가결한 시작점이다
노무현 정신은 과연..
서기원(논설위원, 의정부의료원,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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