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자세: 원수 사랑 및 부정과 불의에 대한 비폭력 저항
본고는 이재봉 명예교수가 2023년 10월 1일 전주 <평화통일기도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발췌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저는 예수의 가장 큰 가르침이 원수 사랑뿐만 아니라 부정과 불의에 대한 비폭력 저항이라 생각합니다. 원수에게도 적개심을 갖지 말고 사랑으로 대하며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이끌고, 제국의 억압과 착취 및 사회의 부정과 불의에는 체념하거나 순종하지 말고 적극 저항하라는 것이죠.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종을 미덕이라 여기는 것 같습니다. 정치. 경제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고 비판하기를 자제하며 체제에 순응하고 악한 폭력에도 방관하거나 복종하는 것을 당연시하거나 정당화하면서요. ‘기독교인들의 윤리 행위의 지침’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 또는 산상수훈을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이겠지요. 특히 5장 38-41절의 다음과 같은 대목 말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이 설교를 그 무렵 시대 상황에 비추어 받아들이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요? 첫째, 오른뺨 왼뺨과 관련해, 오른뺨을 치려면 왼손을 써야 합니다. 당시 중동 지역 종교법엔 왼손으로 삿대질만 해도 10일간의 참회 구류에 처하도록 했답니다. 뒷간에서나 사용하는 더러운 왼손으로 사람을 때릴 수 없었다는 거죠. 오른뺨을 치려면 오른손등을 쓰기 마련인데 이는 상대를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치욕과 멸시를 안겨주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노예나 하인의 오른뺨을 손등으로 치며 멸시하는 윗사람에게 왼뺨도 돌려대라는 것은 때리는 윗사람이 오른 주먹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맞는 노예나 하인도 동등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거죠. 윗사람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 저항입니다.
둘째, 속옷 겉옷과 관련해, 빚이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 돈을 빌려 갚지 못하자 채권자가 채무자를 고발해 빚 대신 속옷을 빼앗으려 했답니다. 집 없는 극빈자에겐 겉옷이 몸을 덮고 잘 수 있는 이불이었기에 최후의 유일한 재산인 겉옷까지 빼앗을 수는 없으니까요. 만약 겉옷을 담보로 잡더라도 해질 무렵엔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게 당시 유대 율법이었답니다. 자기를 고발해 속옷을 빼앗으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갖게 하라는 것은 벌거벗은 몸으로 법정을 나옴으로써 이웃 사람들로 하여금 가난한 자를 편들고 부자를 비난하게 이끄는 거죠. 당시 세금을 착취하는 로마 지배계층에 대한 항거를 암시하기도 했을 테고요. 착취자들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저항입니다.
셋째, 오리 십리와 관련해, 당시 로마 군인들은 로마 황제가 만든 강제노역 규칙에 따라 자기들 짐이 무거우면 식민지 백성들에게 짐을 대신 지도록 할 수 있었답니다. 법에 따라 5리까지만 허용하면서, 법을 어기면 처벌했고요. 강제로 오리를 가게 하는 지배자에게 십리를 동행하라는 것은 그가 법을 어기도록 만드는 것이니, 지배자들에 대한 노예의 순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의 저항입니다.
이처럼 예수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되, 윗사람과 착취자 그리고 지배자들에게 순종하지 말고, 제국의 억압과 착취 및 사회의 부정과 불의에 저항하라는 설교 또는 수훈을 남겼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물론 적극적으로 저항하되 반드시 비폭력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신학자 같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악에 대해 악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는 ‘무저항’을 내세우며 기독교는 모든 형태의 폭력과 전쟁을 불법적인 것으로 인식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침략적이든 방어적이든 모든 전쟁을 반대하며, 어떤 상황에서든 악한 자의 생명도 해치거나 빼앗을 수 없다고 했고요. 전쟁을 위한 훈련은 물론 징병에도 “단호하게 그러나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거부하는 게 기독교인의 명예롭고 엄숙한 임무라 여겼지요. 평화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선을 가르치는 종교와 전쟁이 병행하거나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겁니다.
예수의 산상설교와 톨스토이의 주장에 인도의 간디는 벅찬 감동에 휩싸이며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받아 비폭력 저항을 주도했습니다. ‘무저항’이 ‘악에 대해 악으로 저항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지만, ‘무저항’이란 말 자체가 무슨 일에도 저항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에, 부정과 불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되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한 것이죠. 상대방을 해치거나 괴롭히는 폭력으로 패배시키는 게 아니라 자기가 고통이나 고난을 당함으로써 상대방의 양심을 찔러 그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게 한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디를 ‘무저항주의자’로 오해하지만, 그는 부정과 불의에 대해 저항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비겁하거나 무지한 약자의 행위라며, 자신을 희생하며 비폭력적으로 저항하기 어려우면, 차라리 복수와 죽음을 무릅쓰고 폭력적으로 저항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함께 예수의 원수 사랑 관련 얘기 한 토막 덧붙입니다. 저를 몹시 사랑해주셨고 제가 매우 존경하는 목사.교수와 장로.교수에 관한 사연입니다. 이화여자대학 교수로 세계YMCA 회장 등을 지내다 2022년 돌아가신 서광선 목사의 아버지 목사는 한국전쟁 중 평양에서 북한군에 처형당했습니다. 밧줄에 묶인 채 따발총 자국으로 피투성이 된 시신을 거두며 어린 아들은 “아버지, 이 원수를 갚아 드리겠습니다”고 맘에 새겼답니다. 그러나 훗날 목사가 되어 예수의 제자로서 북한과의 화해 협력에 앞장섰어요. 원수를 사랑으로 갚은 거죠.
버지니아 노폭주립대학 교수로 미국에서 사회사업 및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2021년 돌아가신 김동수 장로의 아버지 목사는 한국전쟁 중 서울에서 북한군에 체포돼 가슴과 등에 ‘민족반역자’와 ‘딸을 미제에 팔아먹은 목사놈’이란 죄패를 두르고 끌려다니다 처참하게 총살당했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고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교수가 되고 장로가 된 아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대북 지원에 앞장서며 북한과의 화해 협력과 평화 통일에 힘썼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며 예수를 닮자는 기독교인들이 북한을 주적으로 삼자는 정부 방침에 눈감거나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게 순종의 미덕일까요? 북한을 형제 동포로 여기기는커녕 적으로 간주하며 원한과 적개심을 품는 게 바람직한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냉전 종식 이후 중국을 통해 먹고 살다시피 해왔는데 중국을 봉쇄하며 중국과의 전쟁에 휘말리기 쉬운 군사동맹에 돌진하는 것을 용인하는 게 기독교인들의 도리인지 고민해보시고요. 원수 사랑 및 부정과 불의에 대한 비폭력 저항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기독교인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글/ 이재봉 명예교수(원광대학교 평화학 명예교수, 하와이대 정치외교학 박사, 남이랑북이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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