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색동 가죽신'은 최송림작 '6•25 동족상잔 70년 통일연극시리즈' 중 하나다. 본고는 북경기신문사가 선정한 한국전쟁 70년 기억작품으로 '색동 가죽신'을
지난 2020년 2월 28일부터 9월 10일까지 연재한 것을 모아 전편을 소개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색동 가죽신
최 송 림 作
●나오는 사람들
배꼭지 (80대 할머니, 치매기가 살짝 있는)
나광삼 (30세 안팎의 구두 대학병원 청년)
허리박 (50대, 공원의 환경 미화원)
가판녀 (40대, 신문 가판 아줌마)
맹 구 (20세 안팎의 술집 삐끼)
막 내 (18세, 십대 술집 아가씨)
● 때
현대, 봄날 개나리꽃 필 무렵
● 장소(무대)
도심지 틈새 작은 망향공원 입구 한 모퉁이에 페인트로 ‘구두대학병원’ 이라 써놓은 나광삼의 일터가 주 무대이다. 구두도 닦고 수선도 해주는 그의 일터를 중심으로 양쪽에 날개처럼 신문가판대와 공중전화 부스가 있고, 구석진 곳에 벤치도 필요하겠다. 가판대와 공중전화가 붙어있어도 상관없다. 공원 너머 빌딩숲을 배경삼아 적당한 곳에 단란주점 ‘영계촌’ 의 간판도 보인다. 아무쪼록 공원 풍경과 유흥가 특유의 배경 건물 분위기를 살려 무대 공간을 최대한 조화롭게 꾸미면 좋겠다.
(무대 밝아지면, 배꼭지 할머니가 동그란 조명 속에서 동전만 넣고 전화번호도 제대로 못 누른 채 그냥 공중전화를 걸다가 안 되니까 실망하여 어두워지는 조명과 함께 꿈결처럼 사라지듯 퇴장하는데, 맞물리듯 신문 가판녀의 핸드폰 벨이 요란하게 울려 누군가와 통화를 마임으로 한다. 도시의 거리를 낀 모퉁이 작은 틈새공원 풍경이랄까, 망향 공원사람들의 일상 이 오늘도 펼쳐지는 것이다.
코털을 기른 나광삼이 ‘구두대학병원’에서 열심히 구두를 닦고 있다. 낡은 카세 트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가요 ‘봄날은 간다’를 따라서 흥얼거리며. ♬‘연분 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봄 제비 넘나드는 성 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공원 조경 내지는 지하철 공사라도 하는지 포클레인 소리 등 공사장 소음이 이따금 들려오기도 한다. 공사장 소음은 공연 내내 사라졌다가도 잊어버릴 만하 면 다시 살아나기를 되풀이한다. 이 소음은 어쩌면 두 동강난 한반도의 허리 통 증을 상징하는지 모른다. 빗자루를 든 환경 미화원 허리박이 공원 청소를 하다가 허리통증을 느끼고 가벼운 주먹질과 함께 허리를 쭉 펴면서 괜히 투덜거린다.)
허리박 에이그, 허리야… 저놈의 지긋지긋한 소리! 공사는 언제쯤 끝날 건지, 젠 장맞을…
(그러다가 후미진 벤치에서 색동 여자 가죽신 한 켤레를 발견하고 다가간다)
허리박/ (색동 가죽신을 들어 보이며 가판녀에게) 이봐, 가판여사… (그때까지도 전화를 받고 있자 우정 혀를 차며 눈을 흘기고 나광삼에게) 어, 코털 나 원장! 요거 배꼭지 할머니 구두 아니여?
나광삼/ (그때야 고개를 들며 카세트 볼륨을 낮춘 후) 박허리 아저씨가 왜 그걸…?
허리박/ 아따, 허리박이라니까! (DJ DOC의 ‘허리케인 박’ 한 소절을 서툴게 부르며 무리한 춤까지 곁들여) ♬‘오랜만에 만난 그녀∼ 떡볶이를 너무 좋아해 / 찾아간 곳~은 찾아간 곳은 신당동~~~떡뽁이~집/ 떡볶이 한 접시에 라면 쫄면 사리 하나/ 없는 돈에 시켜봤지만 / 그녀는 좋아하는 떡볶이는 제쳐두고/ 쳐다본 것은 쳐다본 것은 뮤직 박스 안에 DJ이라네/ 무스에 앞가르마 도끼빗 뒤에 꽂은 신당동 허리케인 박/ 아~~~아 신당동 허리케인 박 뮤직박스 안에 허리케인 박/ 삼각관계 허리케인 박∼’ 영계촌에 미스 누구냐, 거시기 그 막낸가 하는 계집애, 심심하면 흥얼거리는 거 못 들어봤어? 허기야 만날 연분홍 치마만 찾으니… 배 노파와 딱 어울린다니까.
나광삼/ 아저씨는 가판 아줌마하고 딱 어울리고요?
가판녀/ (때마침 전화를 끊고 들었는지 펄쩍 뛰듯 전라도 사투리) 뭐시여? 누가 누구하고 어울린다고라고라?
나광삼/ 전화 끝났어요?
허리박/ 뭔 전화를 그리 오래 붙들고 살아?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애인 키워?
가판녀/ 남이사 애인을 키우든 서방을 분양받든, 아, 박씨가 뭔 상관이랑가?
허리박/ 왜 상관이 없어? 우리는 다 같이 하나로 똘똘 뭉친 공원식군데, 의리가 있어야지. 짝꿍이 필요하면 가까이서 찾는 게 틈새공원 의리 아냐? 저 코털총각도 있고, 이 허리박도 있는데.
가판녀/ 됐당게. 박씨는 공원청소나 신경 쓰셔. 아, 어제도 개똥 안 치웠다고 민원 이 빗발쳤다며?
허리박/ 개똥이고 쥐똥이고 아, 박씨 박씨 하지 마. 내가 무슨 박씨 물고 다니는 강남 제비야? 천하에 풀쐐기 같으니라구! 그러지 말고 식구끼린데, 허리춤 이라도 한판 흔들자고…
가판녀/ 만날 허리 아프다면서 춤은 무슨!
허리박/ 아프니까 흔들어서 풀어줘야지. (운동하듯 허리를 흔들며) 허리운동, 몰라? 케케묵은 저 따위 옛날노래는 내가 아예 개똥처럼 싹 쓸어서 쓰레기통에 처박을 모양이니까, 젊게 살자고. (제 흥에 겨워) ♬‘허리케인 박∼’ (억지로 디밀듯 손을 잡아끌고 춤을 추잔다)
가판녀/ (남사스럽다고 주변을 둘러보고) 이 양반이 왜 이래? 술 마셨수? 벌건 대낮에 미쳤나벼. (그래도 싫지만은 않는지 ‘연분홍 치마가∼’ 라디오 음악에 맞춰 콧노래를 따라 부르며 은근히) 블루스라면 또 모를까…
허리박/ (짐짓 튕겨보듯) 블루스는 무슨 블루스야. 중년 늙다리들이 그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서 뺑뺑이질 하는 거… 가판여사 요즘 카바레출입이 잦다더니, 진짜 바람난 거 아냐?
나광삼/ (덩달아) 부쩍 걸려오는 전화가 많은 걸 보면 혹시 또 모르죠.
가판녀/ 아, 요즘 세상에 이혼녀 돌싱 바람나는 것도 흉이당가?
허리박/ (짐짓 타이르듯) 장사 끝나면 막 바로 집에 가. 금지옥엽 중학생 고명딸이 기다린다며? 괜히 혼자 외롭다고 카바레 같은 데 드나들다 제비한테 잘 못 걸리면, 이것저것 몽땅 다 털리고 개망신 당해. 아, 우리끼리 이렇게 어울리는 대낮 거리의 막춤이 최고라니까.
(억지 막춤을 또 춘다)
가판댁/ (혼잣말처럼) 이 천하에 짠돌이 구두쇠 양반하고는, 카바레 갈 돈이 없다고나 할 것이제. 아니면 블루스를 못 추든지… 코털총각, 내 말이 맞지라?
나광삼/ 네, 블루스라면 이 코털총각 아닙니까요? (허리박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약 올리듯) 싸모님, 언제 한번 시간 내주시겠습니까?
가판댁/좋제, 오늘이라도 당장…
허리박/ (가로막듯) 잠깐! (내가 나광삼 너 같은 피라미한테 뺏길소냐, 이래도 못 추느냐고 실력 발휘하듯 잽싸게 손을 잡고 끌어안아 블루스 스텝을 밟는다)
가판댁 /(졸지에 안겨) 웬 무례 난폭한 늙은 제비당가?
허리박/ 아, 물찬 낭만제비여!
나광삼/ (손뼉을 치며 바람이라도 잡듯) 브라보, 원더풀! 환상의 짝꿍이네요. 그림 참 좋습니다? (허리박에게 졌다고 두 손 번쩍 들며) 항복!
가판댁/ (짐짓 많이 봐준다는 듯) 춤은 대충 되는 것 같으니까 돈만 쬐끔 있으면… (별안간 코맹맹이 소리로 꼬시듯) 오늘 밤 저 아래 시장사거리 궁전카바레 갈까나? 돌싱 스트레스 확 풀리게 제대로 한번 땡겨봐∼ㅇ?
나광삼/ 그러세요, 아줌니 말씀 들으세요. 돈 몇 푼 아끼겠다고 거리에서 천지도 모르고 깨춤 추는 요즘 젊은 애들 따라 하시다가 허리 왕창 더 다쳐요, 허리 아저씨! 아저씨가 무슨 비보이라고, 군대서 훈련받다가 다쳐서 의병제대했다는 그 알량한 허리… 정말 더 박, 박살나고 싶으세요?
허리박/ (그냥 한번 해봤다는 듯 슬그머니 춤을 풀며 주운 구두를 챙겨들고) 어허, 어르신 희롱 죄가 있다는 걸 알겠지? 본관은 나라를 지키듯 가정을 지키는 대한민국 표준 성실남이야. 그나저나 자네는 호칭부터 정리해야 되겠네. 세금 붙는 것도 아닌데 기왕이면 멋있게 불러주면 어디 덧나? 내가 자네를 괜히 원장님이라 부르는 줄 아느냐구?
나광삼/ 아 예, 허리케인 박이라 불러드려요?
허리박/ 나 원장, (구두를 코앞까지 디밀며) 정말 뿔난 망아지처럼 계속 엇나갈 거야?
가판댁/ 잘하면 한 대 맞겠다? 그냥 불러드리삼.
나광삼/ (구두를 받으며) 아, 알았어요. 허리박 아저씨라고 불러주면 될 게 아녀 요. (구두를 살펴보고) 맞네요, 박 허리…가 아니고, 허리 팍(박이 아니라) 아저씨! 어제도 변함없이 내가 닦아드린 할머니 구두, 근데 웬 흙이 이렇게 많이 묻었대요?
허리박/ (허리박이라는 말에 우정 기분이 좋아졌다가 금세 심각해져) 할머니 구두 닦아드린 게 어제 몇 시쯤이었지?
가판댁/ (새삼스럽다고) 왜 그런대요, 박씨, 아니 허리박 아저씨?
허리박/ 글쎄, 언제쯤이었냐니까?
나광삼/ 몰라요.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고) 진짜 몰라서 물으세요? 배할머니 지금어디 계세요? (허리박이 모른다고 도리질하자) 그럼 이 구두는 어디서 났어요?
허리박/ 공원 청소를 하는데, 구석진 벤치 위에 반듯이 놓여 있더라구. 속에 흙이 담긴 채.
가판녀/ 나도 출근하면서 먼발치로 얼핏 본 것 같은데, 설마 배할머니 구둔 줄은 몰랐네.
나광삼/ 무슨 말씀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할머니 구두가 왜 거기에 있어요?
허리박/ 어허, 나도 지금 그것이 궁금해서….
(막내가 야릇한 모습으로 ‘오랜만에 만난~’ 하고 ‘하리케인 박’의 첫 소절을 흥얼대며 춤추듯 등장하자 허리박이 제일 반긴다.)
막 내/ 뭐가 그리도 궁금한데요, 허리박 아저씨? 안녕들 하세요?
(허리박이 막내의 율동에 호응하듯 몸을 흔들다가 허리에 통증을 느끼고 멈춘다. 그는 그래도 막내가 제일 멋있다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는데, 그녀는 얼핏 가판대 신문을 보고 코웃음 치듯-)
막 내/ 흥! 뭐, 통일열차 예매?
가판녀/ 어제 석간이야. 오늘 아침신문은 여기….
막 내/ 어쨌든요, 저 같은 건… 설 ․ 추석 귀성열차도 예매 못하는 팔자잖아요. 완전 짱 신경질 나!
허리박 막내 너, 배 할머니 알지?
막 내/ 내가 배든 사과든 할마씨를 알아서 뭐하게요. 그러지 말고 돈 많고 뒷골 당기는 멋쟁이 파파나 있음 화끈하게 소개 좀 해줘 봐요, 광삼이 오빠.
나광삼/ 왜, 전세 애첩이라도 되게? 세월 더 가기 전에 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나 해, 이 철부지 아가씨야.
가판녀/ 그래, 부모님이 얼마나 기다리겠어.
막 내/ 왜 기다려요? (한가한 소리 한다고) 기다리는 부모님이 있는데 이 어린 나이로 돈벌이 나섰겠어요? 전요, 중학교 다니는 아줌마 딸이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요. 아줌만 딸 말이라면 무조건 다 들어주잖아요?
허리박/ 딸 때문에 산다잖아.
나광삼/ 세상엔 가족밖에 없단다, 막내야.
가판녀/ (딸 가진 부모 심정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안쓰럽다고) 그래, 하루빨리 따뜻한 가족 품으로다…
막 내/ (신경질적으로) 아, 됐어요. 남의 속도 모르면서!
(세 사람 뒤통수를 맞은 듯 막내를 바라보는데, 맹구가 세상이 이렇게 즐거울 수 없다는 양 코미디언 몸짓을 흉내 내며 춤추듯 등장한다. 허리박이 또다시 따라 춤추려다가 허리통증을 생각하고 자제한다.)
맹 구/ (짐짓 노려보듯) 일하는 아저씨들 붙들고 무슨 사설이야?
막 내/ 주간지 하나 사러 왔어. 사설은 무슨 사설이라고 난리야. 신문사설 하나도 못 읽으면서… (돈을 가판녀에게 주고, 주간지를 똘똘 말며) 들어가면 될 게 아냐. 그새 누가 도망친다고 도끼눈일까!
(맹구를 쏘아보고 퇴장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며, ‘허리케인 박’의 마지막 소절을 노래한다. ‘삼각관계 허리케인 박~!’)
맹 구/ (얄밉다고) 저게?
나광삼/ 자네가 막내 감시병인가 보지?
맹 구/ 감시병요? (묘한 여운이 남게) 어떤 의미에선…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죠. 영원한!
허리박/ 영원한?
맹 구/ 어쨌든 저번에도 두 년이 목욕탕, 찜질방에 간대놓고 날랐거든요. 우리 영계집에서 막내가 그중 영계잖아요. 당연히 특보를 해야죠.
가판녀/ 특보라니?
맹 구/ 특별보호요.
나광삼/ (웃으며) 주민등록증을 압수해둔다며? 왜, 은행통장이랑 현금카드도 빼앗아놓지.
맹 구/ 삼십육계를 놓는데 그딴 게 무슨 소용 있겠어요. 민증은 분실신고하면 되고, 은행은 비밀번호 바꾸면… 당할 재주가 없더라구요. (구두를 신은 채 거만스레 발을 떠억 내밀며) 닦아주세요!
나광삼/ (같잖다고 맹구를 잠시 노려보다가, 발을 사정없이 떼밀어버리며 벌떡 일어선다) 자식이!
맹 구/ (뒤로 자빠지면서 약간 겁먹고) 왜 그래요, 광삼이형!
나광삼 (달려들어 때릴 듯) 꺼져, 새꺄! 캭, 밟아버리기 전에!
가판녀 평화로운 공원에 갑자기 웬 전운이 감돈당가?
허리박 참어, 나 원장!
맹 구 이러지 마쇼, 막내 좋아하는 걸 다 알아요. 행여 딴 맘먹고 빼돌리기라도 해봐라, 그땐 알아서 하셔? 생피가 튀길 테니까!
나광삼 맹구 너 이 새끼, 협박하는 거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술집 삐끼에다 포주 똥개 노릇이나 하는 주제에!
맹 구 사돈 남 말 하고 있네.
나광삼 뭐야, 이 새꺄?
허리박 (붙들고 말리듯) 나 원장, 참으라니까. 별일 아닌 것 갖고 이러다 진짜 큰 싸움 나겠어. (맹구에게) 어서 가지 못해?
가판녀 (짐짓 구경을 즐기듯) 사내들이란!
맹 구 박 아저씨가 원장원장 하니까 진짜 대학원장이나 병원장쯤 되는 줄 착각하시나 본데… 내가 뭐 힘이 모자라서 피하는 줄 아쇼?
나광삼 그럼 똥이 더러워서 피하냐, 새꺄? 아저씨, 놔요. 미친개한테는 몽둥이밖 에 없어요.
(허리박이 나광삼의 허리를 더 단단히 잡는다)
맹 구 골목 입구라 우리 가게 아가씨 도망치는 거 좀 봐 달라 부탁한 건도 있고 해서… (거의 다 퇴장하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을 쥐고 폼 잡는다는 게 차라리 우스꽝스럽다) 한판 붙어볼 테야? 오늘 새벽에도 공원에서 송장 하나 치웠는데, 어디 이 동네 줄초상 한 번 나볼 거냐구?
나광삼 (허리박에게 붙들려서도) 너 이 새끼, 제삿날인 줄 알어!
맹 구 (갑자기 태도를 바꿔 혀를 날름 내밀며 애들처럼) 메롱, 약 오를 거다. 용 용 죽겠지? (나광삼이 허리박을 뿌리치자, 놀라서 노루처럼 펄쩍 뛰듯 도망치며) 나 잡아 봐라아~! (잽싸게 퇴장한다)
허리박 (나광삼의 뿌리침에 쓰러져) 아이쿠, 허리야!
(나광삼이 맹구를 뒤쫓다가 쓰러진 허리박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뒤돌아온다. 공사장 소음이 다시 들렸다가 사라진다.)
나광삼 (부축하며) 괜찮으세요, 아저씨? 허리도 안 좋으신데 그냥 구경만 하시 지, 왜 말린다고 나섰어요. 맹구 그 녀석은 혼구녕이 나야 한다구요. 맹 구, 그야말로 개 아닙니까?
가판녀 제 딴엔 코미디언 흉낸 잘 낸다고 스스로 붙인 이름이라던데? 그만하면 됐어. 늘 보는 이웃끼린데… 맹구 놈도 속으로는 뜨끔했을 게야.
허리박 근데, 그 녀석 이상한 말 하지 않았어? 새벽에 무슨….
나광삼 설마 배꼭지 할머니겠어요? (자기 일자리로 원위치하며) 아저씨, 정말 괜찮겠어요?
허리박 뭐가?
가판녀 허리 말이것제. 그 허리 갖고 뺑뺑이나 어디 제대로 한번 돌리겠어라?
허리박 염려 붙들어 매셔. (짐짓 웃으며) 싸움 말리려고 엄살 좀 부렸지, 뭐. (허리운동을 가볍게 하며 유머랍시고) 하마터면 걸어 다니는 일기예보 기상대를 망가뜨릴 뻔했잖아.
나광삼 아저씨 허리는 중앙기상대보다도 더 정확하죠. (눈을 들어 기분 전환하듯) 날씨 참 화창하네요. 목련꽃이 영계집 아가씨들처럼 화들짝 피었다 자지러지자 개나리꽃이 질세라 덩달아서 보지러지게… 봄날은 봄날이죠?
허리박 (맞장구치듯 노래하며) ‘~봄날은 간~다’. 좋은 계절이지.
가판녀 얼씨구! 남자들도 봄을 타나 벼? 가을남자 봄 여자 아녀?
나광삼 봄이든 가을이든 날씨가 계속 이럼 아저씨 허리는 언제 아프죠? 허리가 아파야 비가 오고,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 아저씨는 소주를 진통제삼아 마시고 나는 위로삼아 대작하며 (술잔을 부딪치고 비우는 시늉하며) 캬아!
(공사장의 소음, 또다시 희미하게 살아났다가 사라진다.)
가판녀 그거라면 굳이 비하고 무슨 상관이당가? 요즘 같으면 저놈의 공사 때문에 손님이고 뭐고 다 글렀잖여?
나광삼 어허, 이 아줌씨 큰 일 낼 여살세. 대명천지에 사고 한번 (가판녀 사투리 흉내낸답시고) 치라고라~요?
허리박 그것도 사고라고… 아냐. 그렇지, 달콤한 사고. 낮술사고, 어때?
나광삼 에잇, 아저씨까지 영업방해하면 어떡해요? 손님이 있든 없든 맑은 정신 으로 신성한 일터를 지켜야죠. 단골손님이라도 찾아왔다가 술판을 보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아저씨도 근무 중이잖아요.
가판녀 상습 음주근무자!
허리박 자고로 우리처럼 막일꾼은 술이 한잔 들어가야 일의 능률이 오르고, 노동이 즐거운 법일세. 농사꾼도 농주 힘으로 농사를 짓는다잖어?
나광삼 (더욱 열심히 구두를 닦으며) 핑계는 참…
허리박 (나광삼을 새삼 흐뭇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요즘 세상에 자네 같은 청년도 드물 걸세.
가판녀 그건 그려.
허리박 그나저나 저 가죽신은…
나광삼 나중에 할머니가 찾으러 오시겠죠. (관객이 안 보이게 보관해둔다)
허리박 할머니 이상하지 않아? 신지도 않는 골동품 같은 옛날 구둘 요즘 부쩍 닦으러 오시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흙을 담아 아예 내버린 것까지… 완전히 노망드셨나?
나광삼 그러게요. 맨 정신으로야 버렸을 리 있겠어요? 얼마나 아끼시는 가죽신인데, 하루가 멀다 하고 닦는….
허리박 공짜라 그러는 거 아냐? 우정 돈 한 번 달래보지 그래?
가판녀 박씨도 공짜면서 뭘 그랴?
나광삼 네, 아줌마까지 포함해서 공원지킴이 식구 세 사람은 하늘이 무너져도 무조건 공짜에요, 공짜! 내가 여기서 딲새를 하는 한 책임지고.
허리박 (싫지 않아 복창하듯) 책임지고!
가판녀 (덩달아서) 무조건!
나광삼 무조건 책임지고 구두는 얼마든지 공짜로 닦아드릴 수 있는데, 전화가 문제네요. 정말 난처하다구요. 엊저녁에도 숫제 어린애처럼 떼쓰는 거 보셨죠?
(조명이 장면전환으로 잠시 흐릿해지면, 한쪽에서 배꼭지가 예의 그 색동 가죽신을 들고 나타난다. 배꼭지 쪽의 밝은 조명으로 무대 전체 되살아난다. 엊저녁의 일이다.)
배꼭지 (나광삼에게 막대기 알사탕 따위 먹을 것을 주며 이북 사투리가 간간이 튀어나오는 말투로) 코털 총각, 내 색동 가죽신 신경 써서 특별히 잘 좀 닦아주기요. 멀리 신고 갈 기니깐두루.
나광삼 (가죽신을 받으며) 어서 오세요, 할머니. 닦는 걸랑은 염려 붙들어매시랬잖아요. (다른 구두를 제쳐두고 할머니 가죽신부터 정성들여 닦으며) 제 이름이 광삼이 아닙니까, 빛 광 석 삼! 나광삼! 광이 번쩍번쩍 빛나도록 세 번씩이나 닦는다고요.
가판녀 (끼어들듯) 번쩍번쩍 광나는 구두 신고서 언제는 멀리 가신다고 안 하셨 어라? 그러시곤 언제 한 번 신어보기라도 하셨당가요?
허리박 금부처도 아닌데 맨날 맨날 닦기만 하면 뭐하신데요, 할머니?
배꼭지 (눈을 흘기듯) 자네는 일 안하고 예서 뭘 하셔?
허리박 공사 때문에 쓸어봤자… (공사 소리가 들리자) 저 소리 안 들리세요?
배꼭지 (짐짓 안 들리는지) 무슨 소리?
허리박 저 공사장에서 나는 소리요.
배꼭지 (소리와는 상관없이) 쩨쩨하게 이따위 손바닥만 한 공원 청소나 하지 말고서리…
허리박 (귀 따갑게 들었답시고 웃으며) 신의주나 원산으로 통하는 통일로나 말끔히 쓸라고요? 아참, 할머니! (가판대의 신문을 보여주며) 통일열차 예매권이 곧 나온대요. 여기 신문에 났잖아요.
배꼭지 (관심을 나타내며) 통일 뭐래씀매?
가판녀 (신문을 건네며) 한번 읽어보랑께요.
(배꼭지는 신문을 받지 않고 시선을 던지며 건너볼 뿐이다. 까막눈인지 노안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눈만 껌뻑일 뿐 글자를 읽을 수 없다.)
허리박 나중에 통일되면 제일 먼저 고향에 가고 싶은 사람은 철도청에서 미리 기차표를 사두라는 거죠.
나광삼 외국에선 달나라 여행 예매권이 벌써부터 불티나게 팔린다잖아요.
가판녀 제가 크게 읽어드려요?
배꼭지 (부질없다고 손을 내저으며) 어느 하 세월에…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씩 웃고 짐짓 아부하듯) 코털 총각, 다 닦았음 (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내밀며 공중전화를 보고) 전화 좀 걸어주기요. 이 늙은이 색동 가죽신 신고 오늘밤 달이 뜨면 고향으로 떠나니, 꼭 기다려 달라고… (꿈꾸듯) 우리 신랑은 원산에서 제일가는 갖바치 신기료장수지비. 경기중학 붙은 아들 앞세워 마누라 서울귀경 간다고 그 귀한 색동가죽신을 손수 만들어설라무니… (꿈을 털어버리고 한탄하듯) 귀신은 뭘 하고 있는지… 전화 하나 맘대로 못 거는 이 까막눈이 할망구는 날래 안 잡아가고… (아이처럼 떼쓰듯 주저앉아 숫제 징징 운다.)
가판녀 할머니 또 시작이시다.
나광삼 아, 알았어요, 할머니! 전화 걸어 드릴 테니, (일부러 아이 달래듯) 뚝!
배꼭지 (따라서) 뚝!
허리박․가판녀 (짐짓 마주보고 흉내를 즐기듯) 뚝!
허리박 항상 코털원장한테야.
가판녀 (비꼬듯) 젊고 더 똑똑해 보이니까.
허리박 내가 가판여사 눈에는 바보로 보이남?
가판녀 그럼 북쪽에 전화 걸어줄 수 있당가요?
(그들의 소리도 못 알아듣는지 배꼭지가 금세 아이처럼 헤헤거리자, 나광삼은 백 원짜리 동전을 공중전화에 넣고 번호숫자버튼을 누른다. 전화기를 입에 대고 똑똑히 보란 듯이 배꼭지를 쳐다보며―)
나광삼 (짐짓 큰소리로 외치듯) 네, 거기 함경남도 원산 맞지요? 여기 서울인데 요, 이불똥 씨 안 계세요? 유명한 갖바치 신기료장수 할아버지… 아, 네…. 그럼, 서울 배꼭지씨한테서 전화 왔다고 꼭 좀 전해주세요. 오늘밤 달뜨면 집에 도착한다구요. 부탁드립니다. 안녕히 계세요.
(전화 끊자마자)
배꼭지 또 외출 중임메?
나광삼 허구 헌 날 집에 계실 시간이 없나 봐요. (놀리느라) 할아버지 바람둥이 아니세요?
배꼭지 (갑자기 달려들어 나광삼의 멱살을 잡으며 호통 치듯) 무시기, 이 존 간나새끼! 여태 날 속였지비? 이 늙은일 가지고 장난쳤음메? 똑바로 말하라우.
나광삼 (당황하여) 할머니!?
허리박 (말리듯) 할머니가 원산에 전화 걸어달라고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니까, 마지못해서 그런 거잖아요.
가판녀 나원장 잘못 없어요.
배꼭지 (나광삼을 밀치듯 뿌리치고, 구두를 가슴에 안으며 흐느끼듯) 여보, 가겠슴메. 당신 찾아서… 연분홍 구두, 색동 가죽신 신고 오늘밤 달이 뜨면… 여보… 여보… 아바이, 영감…
(♬‘아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애절한 대중가요 배경음악이 깔리는데, 배꼭지는 몽유병 환자처럼 ‘아바이, 영감’을 중얼거리며 사라지듯 퇴장한다.
나광삼과 허리박, 가판녀가 처연하게 바라본다. 조명이 노을처럼 변하며, 시나브로 암전되는데―)
나광삼 (옛이야기 하듯) 원산에서 서울 유학 온 외아들 자취방에 다니러 왔다가 남북이 가로막히는 바람에 남편과 헤어졌댔죠?
가판녀 그토록 오랜 세월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살다 보니, 정신인들 온전하겠어라.
허리박 그려, 노망기만 없으면 참 좋은 할머닌데…
(무대 잠시 어두워졌다가 허리박의 목소리와 함께 해가 떠오르듯 서서히 다시 밝아지면, 나광삼과 허리박, 가판녀, 세 사람은 그대로 회상에서 돌아와 있다.)
허리박 노망기 때문에 달밤에 구두를 버렸을까?
나광삼 그때 그 외아들이 출세해서 떵떵거리며 잘 산다고 자랑이 대단하시던데… 병원에라도 한 번 모시고 가보지. 며느리가 지독한가?
허리박 독종인가 봐? 집을 알아야 신을 갖다 주든지 하지.
가판녀 나원장도 몰라?
나광삼 모르죠. 할머니가 누구한테도…
가판대 나오실 때가 됐는데?
허리박 글쎄 말예요.
나광삼 (생각하면 속상하다는 듯, 무심코 배꼭지 할머니한테 멱살 잡혔던 목을 만지며) 아저씨, 쐬주 한잔 하고 싶댔죠?
가판녀 (먼저 선수를 치듯 짐짓) 나는 낮술 안 마신다?
(나광삼이 감춰둔 소주병을 꺼내 입으로 따려는데, 가판녀 특유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허리박 그놈의 전화벨이 좀 잠잠하다 싶었더니…
나광삼 (웬 시비냐고) 중학생 따님이 깔아준 폰 칼라라 소리부터 다르죠?
가판녀 (전화를 받는다) 네, 선생님! 어디를요? 거기라면… 예예, 알겠습니다. 제 가 당장 학교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혼이 빠진 듯 허겁지겁 서둘며 갈 준비를 한다)
허리박 학교라니, 댄스 교습소 다녀?
가판녀 (정신없는 상태에서 무심코 나오는 말로) 딸애 담임인데, 걔를 누가 여수 에서 봤다고 연락이 왔다네요.
나광삼 (술병을 놓고) 여수라면 전라돈데, 딸이 왜 거기에…
허리박 학교에 안 갔어?
가판녀 (짜증 부리며 큰소리로 울부짖듯) 친구들한테 왕따 당해 학교도 안 나가 고 며칠째 가출했어라, 왜? 이제 속 시원하당가요?
두사람 (동시에 뻥 쪄) 네!?
나광삼 그래서 부쩍 전화통에…
허리박 우린 그것도 모르고……
가판녀 (괜히 두 사람에게 화풀이라도 하듯) 그러니까 가판대 좀 잘 봐줘요. 언 제 올지도 모르니까. 늦으면 나원장 문 닫을 때 가판도 좀 거둬주고.
나광삼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만…
허리박 난 당최 어떻게 돌아가는 심판인지…
가판녀 (자조하듯) 애비 없이 혼자 키우는 결손가정 딸년이 다 그렇지 뭐. 갔다 올게요.
(두 남자는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인 후 급히 퇴장하는 그를 잠시 황망하게 바라볼 뿐이다)
나광삼 요즘 TV를 보면 학교폭력과 왕따 문제로 시끄럽던데?
허리박 글쎄 말여, 이거 원 속상해서… 이 대목에선 무조건 한잔 마셔야 되는 거 아냐?
맹 구 (비교적 고급술인 두견주를 들고 불쑥 나타나며) 한잔 마셔야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근데, 가판 아줌마는 장사도 안 하고 어딜 그렇게 급히 가 죠? 아무리 춤바람이 나도 그렇지, 대낮부터 제비 만나러 가는 건 아닐 텐데… 무엇에 홀린 듯 인사를 해도 안 받던데요?
허리박 넌 몰라도 돼.
맹 구 척 보면 딱이죠.
허리박 뭐가 척딱이야!
맹 구 그럼 나도 좀 압시다, 같은 공원식군데.
허리박 코털 원장만 바빠졌지 뭐냐. 구두 닦으랴, 신문 팔아주랴… 공원 길목공사로 손님이 없기에 망정이지.
맹 구 (변죽만 울린다고) 왕따 시킬 거예요?
허리박 (마음이 무거워 괜히 성질부리듯) 왕따가 무슨 유행병이냐? (아차 싶어 말을 돌리듯) 어, 자네 마침 잘 왔다. 새벽에 뭘 치웠다고 했었지, 아까?
맹 구 (상관없이 나광삼에게) 아깐 미안했어요, 광삼이형! 정식으로 사과할게요. (두견주를 따라주며) 잊어버리고, 한잔 받아요. 이래봬도 진달래, 두견주 라고… 우리 가게에서 제일 비싼 술입니다. 사장님도 좋아해서 서방님 제 사 때 꼭 제주로 쓴대나 어쩐대나… 좌우지간 끝내줍니다.
나광삼 (잠시 망설이다가 멋쩍은 듯 씩 웃으며 맹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고 잔을 받는다) 나도 성질이 더러워서… 벌써 잊었어, 임마. (잔을 들이키고 권하며) 너도 한잔해라!
허리박 암, 그래야지. 뭐니 뭐니 해도 이웃사촌밖에 없다니까. 보기 참 좋구먼. (침을 삼키듯) 귀한 술이라 당연히 맛도 다르겠지? 진짜 끝내줘?
맹 구 물론이죠. 아저씨도 당연히 한 잔 거드셔야죠.
허리박 (잔을 얼른 받아) 근데 이 술 어디서 났어? 손님이 마시고 남긴 거야?
맹 구 (머리를 긁으며)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면…
나광삼 (허리박에게) 싫으면 관둬요, 안마시면 될 거 아녜요?
허리박 아, 아냐! 아무려면 어때, 맹구 성읜데…
(누가 빼앗기라도 하듯 급히 잔을 비운다. 이 틈을 이용해서 막내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듯 살금살금 걸어서 앞을 지나가려고 한다.)
나광삼 (맹구에게 은근히 눈짓하며) 막내가 어디 가나 본데?
허리박 정말! (무심코 외치듯) 막내야, 나는 아무것도 안 본다?
막 내 (소스라치게 놀라서 걸음을 멈추며 어찌할 바를 몰라) 아, 네…
맹 구 (급박한 상황을 수습하고자 무조건 매달리듯) 광삼이형, 한 번만, 딱 한번만 눈감아 줘. (정색하며) 막내를 사랑해요.
(나광삼과 허리박은 뜻밖이라고 맹구를 쳐다보며 어어 없다는 듯 웃는다)
나광삼 (파안대소할 듯) 그럼 막내를 감시한 건 사랑의 눈길이었단 말이야? 눈 을 감아달라니, 어떤 눈을? (놀리듯 오른쪽 눈을 감으며) 사랑의 눈? (왼 쪽 눈을 감으며) 감시의 눈?
맹 구 (왼쪽 눈을 감으며) 우리 가게 여사장이 형을 고용했잖아요?
나광삼 (어이가 없어) 뭐야? 그럼 내가 늬네 사장한테 돈을 받고 끄나풀 노릇을 한다는 이야기냐?
허리박 끄나풀이라면 정보원이라는 이야긴데? 아, 그러니까 영계집 아가씨들 도 망치는 걸 나원장이 골목 어귀에 앉아 있다가 붙잡아 준다는… 말도 안 돼!
맹 구 (얼굴이 확 밝아지며) 아녜요, 그럼? 아무리 몰래 도망쳐도 광삼이형 눈은 못 피한다고 말끝마다 협박 놓길래 여사장이 광삼이형을 매수한 줄 알았지, 난.
막 내 (가슴을 쓸어내리듯 한숨을 내쉬며) 여시(여우)의 고단수 트릭이었구나. 괜히 아침부터 바람 잡느라 별 쇼를 다 부리고 왔다링갔다링 했네. (기지개를 활짝 켜듯 해방감을 만끽하며) 아, 자유!
맹 구 (막내와 손바닥을 부딪치며)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두 사람 숫제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며 좋아한다. 나광삼과 허리박은 술잔을 든 채 철부지들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도 젊음이 좋다는 듯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웃는다.)
허리박 여사장 집에 없어? 막내를 예까지 빼내는 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맹 구 지금쯤 벽제 화장터에 있을걸요. 간밤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나광삼 무슨 소리야?
허리박 시어머니가 있었어?
막 내 상갓집인데도 우리더러 오늘밤 장사하라는 거 있죠. 얼마나 지독한지 말 도 마세요. 시어머니도 며느리 등쌀에 못 이겨 아마 자살했는지도 몰라 요. 낮에는 풀어놓았다가도 저녁만 먹이면 가게 지하 골방에 가두고 밖에 자물통을…
허리박 영업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서?
맹 구 치매기가 좀 있었대나 봐요. 이북 특산물 백화점에서 샀다는 고향 흙을 밤마다 베갯머리에 놓고 자는 것까진 좋은데, 밥에 비벼 먹었대나 어쨌대나…
(허리박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구역질하듯 마시던 술을 울컥하고 나광삼과 동시에 시선이 색동 가죽신으로! 나광삼이 무심코 얼른 감춘다. 맹구와 막내는 아직 보지 못했다.)
맹 구 외아들이 일찍 죽어 쌍과부가 됐는데, 며느리가 술장사를 해서 여태 먹고 살았나 봐요. 일 년 중 밤에 자물통을 안 채우는 날은 딱 하루, 아들 제삿 날이라는 겁니다.
막 내 문을 잠그면 귀신이 젯밥 얻어먹으러 오지 못한다는 소릴 여사장이 어디서 들었는지…
맹 구 간밤이 바로 제삿날이었죠. 며느리는 장사하느라 정신이 없고, 시어머 니 혼자 지하 골방에서 아들 제사를 지내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나가선, 새벽에 공원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거예요. 얼어 죽은 것 같았어요. 아직도 밤엔 춥잖아요. 더구나 노인인데!
막 내 우린 시어머니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동안 여사장이 시어머니를 가게 에 얼씬도 못하게 한 탓이겠죠.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사실을 알았으 니… 맹구 오빠가 시체를 가까운 병원에 옮기는데, 그때 보니 할머니는 가죽신을 품에 꼭 안고 있었어요. 제가 할머니의 유품이라고 챙기니까 여사장님이 재수 없다고 쓰레기통에 버리라지 뭡니까. 하지만 어떻게 쓰 레기통에 버려요. 벤치 위에 고이 놓아두었죠.
허리박 (혼잣말로) 그랬었군.
맹 구 그야 어쨌든 우리한텐 절호의 기회죠. 할머니를 행려병자 취급하듯 화장하러 가면서 저더러 아가씨들 잘 감시하고 있다가 영업 준비나 차질 없이 하라고… 이때 아니면 막내가 빠져나갈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통쾌하다고 웃으며) 고양이한테 생선 맡긴 꼴인가요?
막 내 그동안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나광삼 맹구도 함께 떠나?
막 내 (보란 듯이 맹구와 팔짱을 끼며) 전 맹구 오빠만 믿고 따라 나서는걸요.
맹 구 가판대 아줌마를 보고 막내의 마음이 결정적으로 움직였나 봐요. 딸을 극진히 사랑하는 부모마음에…
가판녀 (이미 한잔 술을 걸치고 나타나며) 부모마음, 사랑 좋제!
허리박 가판여사!
나광삼 (딸이 걱정스러워) 어떻게 됐어요?
가판녀 뭐가 어떻게 돼? (맹구와 막내를 보고) 너희들 여기 떠나? 가정으로 돌아가는 거야?
맹 구 (바람이 나서 장사도 팽개치고 대낮부터 술이나 마신 줄 알고 빈정대듯) 우리들이 아예 새 가정을 꾸릴 거예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정신 바짝 차려야죠. 저도 이제부턴 연예인 흉내나 내는 여사장의 맹구가 아니라 명구, 막내를 끝까지 지키는 유명한 개 명구, 명견이 될 겁니다. 명구, 김명구가 원래 제 본명이기도 하구요.
막 내 (맹구에게) 이 순간부턴 저도 막내라 부르지 마. 내 이름은 행순이야, 남행순. (가판녀에게) 우리 함께 결심했거든요. 검정고시를 쳐서라도 다시 학생이 되고 싶어요. 교복 입은 아주머니 예쁜 따님 같은… 그때까지 계실 거죠? 이 망향공원을 굳건히 지키는, 지킴이로서요.
허리박 암, 있어야지. 두 사람이 어엿한 학생이 되어 나타날 땐 이 허리박 명퇴 나 조퇴, 아예 동퇴를 당해도 좋아요. 어디로 가는데?
맹 구 우선은 여길 빠져나가는 게 중요해요. 차츰 제 고향 쪽으로 내려가야죠.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는 듯 통장과 도장을 꺼내 나광삼에게 내밀며) 여사장 오면 좀 전해 주세요. 그냥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훗날 아저씨들을 다시 만날 일을 생각해서… 막내가 진 빚에서 백이삼십 모자라는 액숩니다. 하지만 그동안 일하고 못 받은 것도 있으니까 크게는….
나광삼 (받으며) 모자란다고 방방 뛰면 내가 쬐끔 보탤게. 걱정일랑 말고 떠나.
맹 구 광삼이형, 정말 고마워요.
나광삼 다시는 이런 데 발 들여놓지 말고.
맹구․막내 (동시에) 명심하겠습니다.
가판녀 (폭발하려는 걸 꾹꾹 잘 참으며) 아, 어서들 안 떠나고 뭘 꾸물거려?
허리박 어서들 가.
막 내 모두들 감사합니다.
(그들이 손을 흔들고 퇴장하는데)
나광삼 잠깐!
(워낙 큰소리에 놀라 그들이 불안하게 돌아본다)
나광삼 (재빨리 가죽신의 흙을 신문지 위에 탈탈 털고 대충 솔질을 한 후) 이거 내가 선물해도 되겠어? 오래 되긴 했지만… 새 거나 다름없어요. 막내, 아니 남행순양 발에 꼭 맞을 것 같아서 말이야.
막 내 누구 건데요?
맹 구 아니 그건…
막 내 (받아서 살피며) 할머니 거잖아요?
나광삼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우리나라 당대의 최고 갖바치 신기료장수가 만든 가죽신이야.
맹 구 광삼이형이 직접 만들어 드렸구나. 광삼이형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갖바치신기료장수, 구두대학병원 원장님이니까. 그렇지, 맞죠?
나광삼 내가 무슨 구두를 만들어? 난 딲새일뿐이야. 그야 어쨌든 한 가지, 꼭 약속해줘야겠어. 이 구두를 신고 절대 다른 데로 빠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막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후 구두를 신어 본다. 한복차림의 배꼭지가 저만큼서 동그란 조명을 이고 홀연히 나타나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다.)
막 내 어쩌면 이렇게도 딱 맞죠? 낮에 보니 색깔도 더 고운데다, 고풍스럽기도 하고… 남들이 보면 새로 유행하는 복고풍 구둔가 하겠어요?
나광삼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보통구두가 아닌 것만은 확실해.
막 내 마음의 선물인 줄 알아요. 교복 차림에 이 구두를 신고 꼭 올게요.
가판녀 (왠지 딸 생각에 끝까지 못 참고 눈물이 왈칵, 소리죽여 남몰래 흐느낀다)
맹 구 꽤나 엽기적이겠다?
막 내 그럼 어때서?
맹 구 (가판녀가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아줌마!
막 내 (이별이 슬퍼서 그런 줄 알고 인정에 감동하여 눈물을 훔치며 가판녀를 달래듯) 또 올게요.
나광삼 암, 그 가죽신을 신고 꼭 와야지. 신고 갈 데가 또 있으니까. (신문지의 흙을 모아 깨끗한 티슈에 담으며) 원산 땅도 밟아야 할 신이야. 원산 앞바다 명사십리 해당화도 구경하고…
맹 구 (어리둥절해서) 원산요?
막 내 (날듯이 한두 바퀴 돌며) 해당화, 명사십리… 아이, 좋아라!
나광삼 물론 통일이 되어야겠지만….
허리박 어서들 가. 이러다 여사장이라도 나타나면 어쩌려고! 우리까지 낭패당하 는 꼴 볼 거야?
맹 구 그럼, 안녕히 계세요.
막 내 꼭 다시 찾아올게요.
(젊은 남녀는 손에 손을 맞잡고 특유의 춤바람을 일으키며 날듯 퇴장한다. 나광 삼과 허리박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흐뭇하게 바라 보다가, 가판녀의 그 참았다가 확 터지는 흐느낌에 시선을 돌린다. 두 남자는 가 판녀의 존재감에 혼란을 느끼고 걱정스럽다.)
가판녀 흑흑흑… 흥, 차라리 잘 됐지 뭐. 딸년이 제 아빠한테 며칠간이라도 있겠 다니, 담임도 권하고… 제 애비가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을 했어야 지. (차라리 웃으며) 흐흐흐, 에미는 그것도 모르고 멀리 떨어져 살면 어 린 마음에 상처가 덜 되리라 일부러 서울까지 이사를 왔건만, 흐흐흐… 자식 가진 죄인이라고, 얘 눈치 보느라 여태… 나도 해방된 민족이랑게! (두견주를 나팔 불고) 야, 코털 나원장, 오늘밤 진짜 나하고 카바레 안 갈 래? 허리케인 박도 끼워주고, 우리 셋이서 함께… 남자 둘 데리고 놀면 남들이 부러워할까, 손가락질할까? 틈새공원 바람둥이 가판녀 만세! (억 지로 나광삼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춤을 춘다)
허리박 (떼어놓듯 우스꽝스레) 잠깐! 가판여사, 셋이 함께 추려면 디스코텍에 가 야지? 이건 아니잖아!
나광삼 (상황판단을 못한다고) 아저씨!
가판녀 (제풀에 흥을 잃은 듯 나광삼을 뿌리치고 다시 흐느끼더니 고개를 들어 흔들고 정신을 차렸는지, 멀쩡한 얼굴로) 걔들이 과연 학생이 되어 구두 를 신고 나타날까? 그래, 맞아. 쟤들을 생각하면 나도 희망이 생기지라. 암, 예전처럼 딸이 교복을 입고 내 앞에 다시 나타나리라는…
허리박 암, 믿어야지. 딸도, 걔네들도 하나같이…
나광삼 네, 아저씨가 공원을 깨끗이 청소하고 내가 구두를 열심히 닦고 있으면 왠지 그들도 약속을 지키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허리박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면, (빗자루를 들며)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래, 이제야 배 할머니가 깨끗이 쓸라던 통일로의 의미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아. 이젠 막내, 아니 남행순 양이 색동 가죽신을 신고 걸어가야 할 길이 되겠지만. 그런데 갑자기 내 허리가 왜 이리 쑤시지?
(공사장의 소음들 살아난다)
나광삼 하늘은 멀쩡한데, 봄 소나기라도 쏟아지려나 보죠?
허리박 (유머스레) 아냐. 이제 청소미화원 허리박 허리도 날씨와 상관없어. 여지 껏 꾀병일 수도 있어. 이 통증을 깨끗이 물리치려면 한 가지 길밖에 없어요. 이 길이야말로 남행순 양의 연분홍 가죽신 길을 단축하는 지름길인지도 몰라. 가판여사 딸의 무사귀환도 포함하여… 내 허리통증의 진정한 의미도 깨달았으니까.
(공사장의 소음이 크게 들렸다 시나브로 작아진다)
나광삼 (조금 남은 흙이나마 유골인 양 반으로 나눠 깨끗한 종이에 싸서 건네 며) 깨달았으면 이것도 받아가세요. 할머니가 우리에게 남긴 소중한 유산 아니겠어요?
(허리박은 무슨 뜻인지 알았다고 그것을 받아 정말 소중한 유물인 양 가슴에 품듯 안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새로운 결의를 다지듯 빗자루를 들고 주변을 힘차게 쓸어나간다.)
나광삼 그래요, 허리박, 아니 허리팍 아저씨. 그렇게 열심히 팍팍 쓸다 보면 통일의 길도 쓸게 되겠죠. 나 또한 구두를 열심히 닦는 게 그 길을 닦는 길이라 생각하고… (그때야 비로소 환영으로 나타난 배꼭지를 문득 발견하고 반가워) 할머니, 어떻게 된 겁니까?
배꼭지 내 고향 내 영감을 날래 만날 길은 이 길밖에 없었지비. 우리 아들이 찾아와 서둘러 떠나자는 바람에 인사도 못하고 오고 말았구레. 내 가죽신은 총각과 박씨 등 여러 친구들이 먼 길 따라 신고 오라고 벗어두고 온 게야. 내 말귀 알아듣겠음매?
나광삼 (고개를 끄덕이며) 고향 흙은 허리박 아저씨와 나눠 가졌고, 가죽신은 막 내 행순이한테 줬습니다.
배꼭지 잘했꾸마. 아까부터 쭉 다 봤지비. 행순이와 명구가 어쩜 가판 아주머니 딸일 수도 있고…
나광삼 네, 그네들이 다 우리의 미래니까요.
(빗자루로 쓸던 허리박이 나광삼을 보고 머리를 갸우뚱한다. 허리박의 눈에는 배꼭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광삼이 헛것을 보고 혼자 중얼거린다고 생각하는 허리박이다.)
허리박 지금 누구한테 하는 소리여?
가판녀 (딸 생각에 빠져 있다가 자기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내가 무슨 소리를 했어라? 딸 생각하느라…
배꼭지 (다시 빗자루 질하는 허리박과 상관없이 나광삼을 향해) 그렇슴매. 미래는 우리네 희망이라니깐두루. 좌우당간 원산에 오면 꼭 날 찾기요.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일순 배꼭지가 사라지듯 어둠 속에 묻히면, 나광삼은 잠시 홀린 듯 허공을 멍하니 바라본다. 자신도 모르게 흙을 싼 종이를 꼭 쥐고! 그러다가 정신을 번쩍 차리고 생각났다는 듯 카세트 플레이어를 켠 후 일상으로 돌아가 허리박의 빗자루질에 질 세라 구두를 열심히 닦는다. 요컨대 다투어 경쟁하듯 통일의 길을 열심이 쓸고 닦는 그들이다.
허리박이 문득 동작을 멈추고 나광삼을 다시 쳐다보니, 그는 구두를 닦던 천에다 검은 구두약을 정성들여 덧칠한다.)
허리박 뭐 만드는 거야?
나광삼 글쎄요, 두고 보시면 압니다.
(나광삼은 작은 깃발을 만들어서 구두대학병원에 달고 적당히 떨어져 거수경례를 한다. 허리박도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는 듯 빗자루를 장총처럼 몸에 붙여 옆에 세운 채 차렷 자세로 ‘그들만의 조기弔旗’를 향해 같이 경례를 하는 것이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살아나 심금을 울리듯 조곡弔曲이 흐른다. 전몰장병들의 추도식 같은데 흔히들 사용하는 ‘경기병 서곡’ 같은 레퀴엠도 괜찮겠다.
가판녀는 두 남자의 모습을 기이하게 쳐다볼 뿐이다.
어느덧 다시 고개를 쳐드는 공사장의 소음을 카세트의 노랫소리가 덮어버린다.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같이 웃고 별이 지면 같이 울던/ 실 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이 마지막 노래는 남북분단과 통일을 더 절실하게 상징하는 다른 가요로 바꿔도 좋다.
서서히 암전된 뒤에도 노래는 커튼콜로 이어질 때까지 무대를 압도한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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