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는지 -최 병 화-
등장 인물 : 향숙,명옥,경비원
때: 초가을
곳: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공원
1, 안녕?
햇볕이 제법 따사로운 한낮,
극이 시작되면 청소복 조끼를 입고 공원에서 청소를 하던 명옥이가 벤치에 앉아서 빵과 우유를 먹고 있다.
명옥] (맛있게 먹다가) 아껴 먹어야지...(살살 먹는다) 에라잇! 먹고 보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데...(다시 신나게 먹는다)
이때, 곱게 차려입은 향숙이가 다가와 벤치 귀퉁이에 앉는다.
맛있게 먹는 명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돌린다.
명옥은 먹던 걸 향숙에게 불쑥 내밀어본다. 향숙이 싫다고 고개를 젓는다.
다시 혼자 먹기 시작하는 명옥. 향숙이 다시 맛있게 먹는 명옥을 바라본다.
명옥] 먹는 거 처음 보우? 줄땐 안 받더니...자! (다시 내밀어 본다)
향숙] (싫다고 고개를 젓는다)
명옥] 뭐야? 벙어리야?
향숙]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명옥] 귀머거린 아니네!
향숙] (맞다고 끄덕인다)
명옥] 싹 차려입고 이런 데는 왜 왔누? 백화점 가서 쇼핑이나 할 것이지...
향숙] (살짝 웃는다)
명옥] 어? 웃네? (손가락을 돌리며) 이거야? 살짝?
향숙] (다시 웃는다)
명옥] 돌았네! 안됐다! (일어서서 가려는데 향숙이가 붙잡는다)
향숙] 지금 몇시예요?
명옥] 지금? (향숙이 팔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고) 여기 있잖아! 시계차고 있으면서 나한테 왜 물어?
향숙] 죽었어요.
명옥] 죽어? 누가? 시계가?
향숙] 네.
명옥] 언제 죽었는데?
향숙] 몰라요.
명옥] 딱하게 됐네! (다시 일어서려는데 향숙이가 잡는다) 왜 그래? 나 일해야된다니까!
향숙] 여기가 어디에요?
명옥] 뭐? 어딘 줄도 모르고 여기 왔다구?
향숙] 꼭 알고 다녀야하는 건 아니잖아요!
명옥] 뭐라구? 확실하네! 치매야! 조기치매! (일어서 가려는데 다시 향숙이가 잡는다)
향숙] 우유는 좋은데...
명옥] 우유? 이거 달라구? 거의 다 마셨는데?
향숙] 괜찮아요!
명옥] 줄땐 안받더니만...(우유를 준다)
향숙] (우유를 받자마자 손에 바른다.) 오랫동안 핸드크림을 못 발라서...
명옥] 제대로 돌았구먼! 안됐다 쯧쯧...(휙 나가고)
향숙이 남은 우유를 여기저기에 바른다.
2, 여기는 지구란다.
서서히 밤의 한가운데로 접어들 무렵,
제법 컴컴해진 공원벤치로 명옥이가 다가온다.
명옥]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구나! 에고...고단한 인생이다...(의자에 앉으려다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이구 어머니!
향숙] (쪼그리고 누워있다가 일어난다)
명옥] 뭐야? 누구야?
향숙] 나에요...
명옥] 나? 나가 누구야?
향숙] 아까 낮에... 만났던...
명옥] (바짝 다가가 얼굴을 확인 후) 아! 그...? 근데 안 다쳤수? 뭔가 물컹했는데?
향숙] 괜찮아요.
명옥] 괜찮긴? 잘 살펴봐요! 내 궁뎅이가 얼마나 무거운데?
향숙] 나도 살집이 좀 있어서...
명옥] 그래서 그런가? 푹신하긴 하더만!
향숙] (웃는다)
명옥] 나중에 군말 없기유 알았수?
향숙] 네.
명옥] 근데 왜 집에 안가고 여기 있수?
향숙] 그냥...
명옥] 그냥?
향숙] 네...그냥...!
명옥] 빨리 가요! 가족들이 얼마나 걱정하겠어? 전화는 했수?
향숙] 아니요.
명옥] 해야지! 왜 안했어?
향숙] 그냥...
명옥] 그냥? 제기랄! 그냥 그냥...그냥이 피곤해서 기절하겠네!
향숙]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그냥인데...제일 쉬우면서 제일 어려운 말...
명옥] 철학자야 뭐야?
향숙] 근데 그쪽은 왜 집에 안가고 여기로 온거예요?
명옥] 나? 그냥!
향숙] (웃는다)
명옥] 웃지 마쇼! 우리가 정붙일 사이는 아니잖아?
향숙] 네. (웃음 멈춤)
명옥] 솔직히 말하지! 나 집 없어! 온 하늘이 내지붕이구 온 땅이 내방구들이야! 됐어? 알았으면 나 좀 누워야되니까 빨리 가쇼!
향숙] 직업 있잖아요! (명옥의 옷을 가리키며) 이거...청소부 조끼 아니에요?
명옥] 이거? 맞아! 청소부 조끼야! 근데 이거 다 구라 뻥이야! 이거입고 청소하는 척하면 아무도 날 안 건드려! 그뿐인가? 수입도 짭짤해! 아까 그 빵하고 우유도 어떤 영감님이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러면서 준거거든!
향숙] 와~머리가 참 좋으시네요?
명옥] 이까이거 뭐! 기본이지!
향숙] 혹시 조끼 남은거 하나 더 있어요?
명옥] 조끼? 왜?
향숙] 나도 좀...
명옥] 입으려구?
향숙] 네.
명옥] 왜?
향숙] 나도... 머리 좀 쓴 건데...
명옥] 머리?
향숙] (자기 차림새를 보이며) 이렇게 입고 다니면 귀부인인 줄 알고 함부로 대하지 않거든요.
명옥] 와! 동지네? 반갑다 악수나 하자! (손을 내밀며) 나 명옥이야! 안 명옥!
향숙] (손을 잡으며) 난 향숙이! 이 향숙!
이때, 호루라기 소리 들린다.
경비원이 다가온다. 명옥, 향숙은 놀라서 의자 뒤에 바짝 엎드린다.
경비원] 어이! 거기! 누구 있습니까? 사람 있으면 빨리빨리 나가세요! 여긴 위험합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사람이 있나를 확인한 후 벤치로 간다)
아이고 고단하다! 오늘은 여기서 자볼까? (벤치에 눕는다)
3, 시인처럼 들풀처럼
똑같은 청소부 조끼를 입고 있는 명옥과 향숙.
둘은 무척 친해져 있다. 어둑한 저녁 무렵, 둘은 소주 한 병 앞에 놓고 마주 앉
아있다.
향숙이가 시를 읊는다.
향숙] 언제쯤 듣게 될까? 바람의 노래를!
바람 따라 찾아온 인연과 모든 그리움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네! 알 수가 없네!
어느 날, 불현 듯 찾아온 외로움
우매한 인간이라 삭힐 수 없네! 삭힐 수 없네!
처절토록 아름다운 어느 봄날, 내 영혼 머무는 그곳에
꽃씨하나 심어 서글픔 달래주오...!
명옥] 캬! 좋다! 너 시인이었어?
향숙] 아니. 그냥...시가 좋아서...
명옥] 멋진 친구가 생겨서 좋네! (잔을 내밀며) 한 잔 더해!
향숙] 됐어! 딱 좋아!
명옥] 그래? 그럼 내가 다 마셔주지! (한 잔 마신 후) 좋다! 세상 그 누구도 안부럽다! 이태백이 마음이 이랬을까? 이몽룡이 마음이 이랬을까? 춘향아! 노래 한 자락 깔아봐라!
향숙] 네 도련님! (노래한다).....“아씨“ 드라마 주제곡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 탄님 따라서 시집가던 날
여기든가 저기든가 복사꽃 곱게 피어있던 길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같이 노래)
옛날에 이 길은 새색시 적에 서방님 따라서 나들이 가던 길
어디선가 저만치서 뻐꾹새 구슬피 울어대던 길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명옥] 좋다! 죽기 전에 꽃가마타고 시집 한 번 가봤음 좋겠다!
향숙] 그래? 그럼 내가 기도해줄게!
명옥] 결혼은 했겠지?
향숙] 나? 그럼! 연하였는데...?
명옥] 연하? 그 시절에? 와! 능력 있네! 근데?
향숙] 저기에 있지! (하늘을 바라보며) 보고 싶다! 나를 너무너무 위해주고 사랑해줬었는데...공주처럼 대해줬거든...정말 좋았어!
명옥] 너무 좋아서 마가 끼었나보네!
향숙] 그러게...
명옥] 자식은?
향숙] 아들 하나야...외국에 살아...
명옥] 따라가 살지 왜?
향숙] 걔도 지금 살기 힘들대. 이번에 전세금까지 다 빼서 부쳐줬어.
명옥] 그렇구나! 내 팔자가 너보다 나은 거 같다! 난 처녀야!
향숙] 처녀? 정말?
명옥] 못 믿겠어? 조사하면 다 나오는데 내가 왜 뻥을 치겠어?
향숙] 어머나....
명옥] 왜? 가엾어 보여? 그럴 필요 없어 사내 맛은 진즉에 봤으니까!
향숙] ....?
명옥] 동거는 해봤다 이거야! 정식 결혼 말구 동거! 근데 괜히 그랬다 싶어! 살아보니 별거 없더만! 치다꺼리만 잔뜩이구!
향숙] 둘이라서 좋은 것도 있잖아!
명옥] 그렇긴 했지!
향숙] 이제 어떻게 할거야?
명옥] 뭘?
향숙] 마냥 이렇게 살 순 없잖아!
명옥] 이게 뭐 어때서? 이리저리 떠돌다 갈 때 되면 가면 되는거지!
향숙] 그래도...목적이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명옥]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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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숙] 응!
명옥] 넌? 넌 어떻게 할 건데?
향숙] 난... 떠날 거야!
명옥] 어디? 아들 있는 데로?
향숙] 아니.
명옥] 그럼?
향숙] 우리나라에서 바람이 젤 많은 곳이 어디야?
명옥] 바람? 제주도?
향숙] 거긴 차비가 비싸서 못 가겠고! 하지만 난 꼭 갈거야! 바람이 제일 많은 곳으로!
명옥] 그냥 나랑 같이 살자!
향숙] 아니. 우린 모두 혼자야.
명옥] 혼자는 언제든 될 수 있어!
향숙] 그렇겠지.
명옥] 그럼 나도 데려가 줘! 재밌게 해줄게 응?
이때, 경비원이 나타난다.
경비원] 어이! 거기! 아줌마들! (가까이 다가오더니) 할머니들! 빨리 나가요!
향숙] 네 알겠습니다 (벌떡 일어난다)
명옥] (향숙을 뒤로 밀고 나선다)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 진짜 경비원 맞아요?
경비원] 당연히 맞지! 이 할망구들이 지금 뭐 하자는거야?
명옥] 그럼 쯩 좀 봅시다!
경비원] 쯩?
명옥] 목에 걸고 다니는 경비원증 있잖아요!
경비원] 그런 것도 있어?
명옥] 지금 나한테 물었어요? 영감님 경비원 아니지?
경비원] 어떻게 알았지?
명옥] 같은 업종끼리 몰라보면 그게 프론가? 아마추어지!
경비원] 그래요? 아이고! 반갑수다! 우리 동지끼리 악수나 합시다! (손을 내밀며) 나 유파요!
명옥] 유파?
경비원] 유파도 모르나?
향숙] 알아요! 삼국지에 나오는 방랑자 유파 맞죠?
경비원] 똑똑하시네! 나보단 못하지만! 자 받아요! 동지 된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오! (무언가를 준다)
명옥] 이게 뭐요?
경비원] 족보!
명옥] 족보? (향숙에게 준다)
향숙] (읽는다) 명휘원 무료급식소?
경비원] 거긴 닭도리탕이 맛있어!
향숙] 전국천사 무료급식소
경비원] 거긴 비빔밥!
향숙] 원각사 노인 무료급식소
경비원] 거긴 떡이 무한리필이야! 가래떡!
향숙] 사랑의 집 무료급식복지센터
경비원] 거긴 도시락!
명옥] 와! 굶어죽진 않겠수다!
경비원] 정보시대에 살려면 그 정도는 필수지! (벤치에 벌렁 눕더니) 와! 달 떴네! 날씬한 초승달이네! 할망구들 저런 것 좀 보고 삽시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세끼 식량 외엔 다 사치요!
명옥,향숙] 어디? (하늘을 보며 바닥에 앉는다)
향숙] 별도 보이네! 아! 예쁘다!
명옥] 그러네!
향숙] 행복해라!
경비원] 지금 이 순간이 최고요! 내일은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니!
향숙] 네! 인간들은 참 어리석어요! 유파 영감님! 혹시 바람이 아주 많은 곳을 아세요?
경비원] 알지!
향숙] 거기가 어딘데요? 네? 가르쳐주세요!
경비원] 힘들텐데!
명옥] 같이 가봅시다! 까이꺼! 셋이 가면 힘들게 뭐있겠소?
향숙] 그래요! 우리 같이 가요! 네?
경비원] 그러든지...(이내 잠 속으로 빠진다)
명옥] 영감님 화끈해서 좋네!
향숙] 젊은 날엔 젊음이 무언지 몰랐고
사랑할 땐 사랑이 너무 흔해서 지나쳤네...
이제와 돌아보니 우린 너무 많이 걸어와 있구나...!
명옥] 뭐해? 또 시 읊어? 우리도 눈 좀 붙여두자 응? 바람 찾으러 가려면 일찍 떠나야되잖아!
향숙] 그래! 그러자!
눈을 감고 잠든 세 사람! 욕심 없는 행복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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