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의 빛’ 보한재 신숙주 선생
고 산영당 앞에서 한글날 행사 준비 중인 신영우 회장 모습
다시 생각하는 한글/ ‘한글 창제의 빛’ 보한재 신숙주 선생
‘국제적 안목과 실무적 능력을 겸비한 조선 전기의 명신’이라는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1417∼1475) 선생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큰 공적을 세웠다. 중국말과 뜻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려고 왕명으로 성삼문(成三問, 1418~1456)과 함께 명나라의 뛰어난 언어학자인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기 위해 요동을 13차례나 내왕하였다. 당시 요동에서 유배 중 이었던 황찬은 신숙주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1417년 6월 13일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난 신숙주 선생은 우리의 한글을 세종대왕과 함께 창제한 공에 대해 지난 1971년 한글날에 당시 한글학회 이사장이었던 허웅 문학박사는 한글 창제 사적비에 “한글이 배우기 쉽고, 쓰기 쉬워서, 우리말로 적는 글로서도 완전하려니와 제자(制字) 원리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점에서 세계의 으뜸가는 문자로 창제된 데에는 신숙주선생의 공이 가장 컸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한글창제 사적비는 의정부시 고산로 163번길에 있는데 경기도 기념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분은 쌍분이며 무송군부인(茂松郡夫人) 윤씨와의 합장묘이다. 쌍분의 중앙 앞에는 1897년에 건립한 묘비가 있으며, 봉분 앞에는 각각 상석과 향로석, 그 앞에 장명등이 1기씩 배치되어 있다. 묘역의 좌우에는 문인석 2쌍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의 하단 우측에는 이승소(李承召, 1422~1484)가 글을 지어 성종 8년(1477)에 건립한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묘역의 하단 좌측에는 1917년 중건된 신도비가 있으며, 하단 중앙에는 1971년 한글학회에서 세운 한글창제사적비가 위치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령 신씨 문충공 회장을 맡고 있는 신영우(67세, 사진)씨는 “신숙주 선생은 폭넓은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적 지식과 안목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젊은 시절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과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불편한 교통과 통신 수단이 작동하던 당시의 이런 여행은 전 세계를 체험한 것과 동일한 의미였습니다”라고 밝혔는데 어쩌면 한글이 지금 디지털 시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실이 신숙주 선생의 이런 국제적 시야와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지녔던 신숙주 선생의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 또는 희현당(希賢堂),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종2품)을 지낸 신장(申檣, 1382~1433)이고,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었다. 세종 20년 (1438)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여 동시에 생원ㆍ진사가 되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가 21세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였다.
특히 중국에 주문사(奏聞使)로 파견되어 임명 교서를 받아왔으며, 관직 생활 전체에 걸쳐 중요한 외교문서를 대부분 작성하고 검토했을 정도로 역대 왕들로 부터 신임을 받았다. 이런 선생의 묘가 의정부 민락동에 모셔저 있다는 사실은 의정부시민들의 자랑이요 선생의 깊은 뜻을 회고 할 수 있는 사적지를 돌보는 문충공 보한재 신숙주 기념사업회 회원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박수를 보내며 우리나라 최고의 보물인 한글을 더 아끼고 발전시켜야 할 것을 다짐하게 되나. 글/ 현성주 기자
글씨/ “제자(制字) 원리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점에서 세계의 으뜸가는 문자로 창제된 데에는 신숙주 선생의 공이 가장 컸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
‘한글 창제의 빛’ 보한재 신숙주 선생
사진설명(8-1-1)/ 신숙주 선생의 영정(높이 1m67cm, 폭 1m 10cm/ 1445년 중국화공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모시에 채색하여 비단으로 배접한 족자로 대한민국 보물 제61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의정부 민락동 고산영당에 있는 영정은 3년 전에 새롭게 만든 필사 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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