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상회(釜山商會)10-사이판
북경기신문 창간11주년 기념 ‘방영훈 미공개 소설’연재
부산상회(釜山商會)10-사이판
오후 2시, 1차 저지선이 무너졌다. 언덕위로 수류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미군 역시 아직 이렇다 할 엄폐수단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난타하는 기관단총에 그들 역시 무력하게 쓰러져 갔다. 서쪽 해안에서부터 중앙에 이르기까지 시체가 즐비하게 너부러져 있었다. 그때였다. 미군 폭격기가 2차 진지를 향해 정확하게 폭탄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대공포가 이리저리 그물망을 펼쳤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그 사이 해병은 다시 언덕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오후 5시가 되자 전투는 잠시 진정세로 돌아섰다. 산발적인 총격은 가해졌지만 양측 모두 숨을 고르는 듯 했다. 미군 역시 일본군의 1차 진지였던 장소와 언덕 아래 잔나무 아래에서 땀을 식히는 듯하다.
그제 서야 태봉은 수통을 열고 입술을 적셨다. 얼마나 입술을 앙다물었는지 입안으로 피가 홍건히 고여 있었다. 주먹밥도 한입 베어 물었다. 갑자기 하체 힘이 쭉 빠지면서 오줌을 지렸다.
그렇게 3일 밤낮 공방전이 오갔다. 그 사이 바다에 떠있는 미 함정에서는 끊임없이 군인들을 해안으로 실어 날랐다. 이윽고 배에 잔류한 미 해병을 보낼 만큼 보낸 미군은 다시 한 번 함대 포사격을 시작했다. 처음과는 달리 비교적 일본군 진지에 근접한 사격이었다. 명령이 떨어졌다. 토굴로의 이동명령이 하달된 것이다. 이쯤 되면 승패는 거의 판가름 난 상태다. 어쩌면 장기전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 문득 태봉은 가미가제 특공대의 충성스런 모습을 상기시키면서 ‘천황을 위한 장렬한 죽음만이 승리’라고 말하던 대좌의 말이 떠올랐다. 뿐아니라 ‘황국신민으로서의 항복은 없다’던 그의 말에서 태봉은 그제서야 갑용이네 가족들 생각을 집어냈다. 순간 그는 총알처럼 빠르게 토굴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서북쪽의 마피산(Mapi Mountain) 아래 일본군사령부를 향해 달려갔다.
그때 그의 눈에 일본군인들에 떠밀려 일제히 반자이클리프(Banzai cliffs. 만세절벽)를 향해 오르는 민간인 대열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깎아지른 듯 한 절벽이 있을 뿐 더 피할 곳도 나아갈 곳도 없는 곳. 바로 아래는 시퍼런 바다가 집어삼킬 듯 그르렁대는 천연절벽일 뿐인 것이다. 그때였다. 사람들의 무리가 추풍낙엽 지듯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 안 돼” 태봉이 고함을 치는 순간 총탄 하나가 그의 가슴을 뜷었다. 갑용의 세 가족은 하얀 모시적삼으로 치장을 하고 서로를 얼싸안은 채 그렇게 떨어져 내렸다. 태봉의 눈에는 마치 흰 벚꽃 꽃잎들이 풀풀 돌아내리며 낙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태봉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티니안 전투>
사이판 섬이 무너졌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티니안섬(Tinian Island)을 지키는 일본군은 미군이 어떤 루트를 타고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방어선을 세 가닥으로 잡았다가 북서쪽 끝 해안은 접안시설이 난코스라 판단하고 동쪽과 남쪽 두 해변에 병사들을 집중 배치했다. 밤이 되면 병사들은 아직 사이판의 정글과 토굴 속에는 남은 병사들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다느니 전멸했다느니 하는 소문들에 대해 수군거렸다. 낮이면 미 정찰기가 한가롭게 섬 일대를 둘러보곤 사라지고 한다.
침묵이 흘렀다. 하루 한차례 소낙비가 때리지 않으면 섬은 평화롭기만 하였다. 어느 날 직속상관인 마쯔다 중좌가 창섭에게 물었다. “자네 신념은 무언가?” “그냥 살고 싶습니다” 세상에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정의, 사랑, 신념, 조국 그 어떤 무거운 말을 올려놓는다 해도 산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지 꼭 살아야지. 내겐 내게 주어진 과업이 있네. 우리가 같이 살아 이 섬을 나가게 된다면 내가 이루고자 하는 세상에 대해 자네에게 꼭 설명해 주겠네”(다음호 계속)
277호 연재/
(지난 호 계속) 이윽고 3일 밤 “일제히 사격중지”라는 고함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전해졌다. 그리고 막사 지붕 위에 백기가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교전은 멈추었다. 일본군인들이 여기저기 잡초더미나 초소, 그리고 방어 모래더미들 사이에서 일어나 두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하나 둘 투항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마쯔다 중위가 우울한 표정으로 서서 미군이 진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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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더위, 밤이면 모기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일제히 포로가 된 일본군은 급속도로 군기(軍紀)가 무너지고 차림새도 꾀죄죄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임시철장 한 군데에 20여명이 갇혀 지내면서 사람들의 식사는 민간인들이 해다 날랐다. 민간인들도 철저하게 감시 감독 하에 지냈지만 그나마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이 별로 없는 게 다행스런 일이었다. 부상병들에게는 따로 막사에서 지낼 수 있게 하고 약이 지급되었다.
활주로 건설이 시작됐다. 활주로는 티니안섬 중앙에서 절벽해안이 있는 남쪽으로 설계된 듯 포로들을 그 방면으로 내몰았다. 섬 전체가 화산석이라 딱딱한 바위가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느 새 해가 바뀌고 봄이 되자 활주로가 윤곽을 드러냈다. 섬 중턱의 산마루에서 바다를 향해 약 3킬로 가량 달릴 수 있는 거리였다. 4월이 되자 오끼나와 섬도 넘어갔다는 소문이 들렸고 그 소문은 진실임이 증명됐다.
이어 B-25 미셀폭격기와 P-51 무스탕전투기들이 속속 섬으로 옮겨졌다. 5개 폭격비행대 중 1개 중대는 사이판, 나머지는 티니안과 괌에 각각 2개 중대씩 배치됐다. 사이판은 정글이 깊고 산이 높아 활주로를 열기가 마땅치 않은 탓이었다. 6월이 되자 B-29기가 배치되고 미 공군의 비행연습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민간인들이 미국이 일본에 가공할 무기를 쓸 것이란 말이 오가고 있다고 알려왔다. 그 정보는 정확하게 8월 6일 오전 8시15분 티니안섬을 떠난 B-29기에 의해 실현됐다. 일명 ‘리틀보이’라 명명된 우라늄탄이 이 폭격기에 실려 히로시마 상공에 투하된 것이다. 그리고 3일후인 9일 아침에는 ‘핏맨’이란 이름의 플루토늄탄이 다시 나가사끼에 투하됨으로서 마침내 일본의 야망은 허무하게 뜻을 꺾어야 했다. 그야말로 진주만 기습으로 잠자고 있던 미국을 건드린 게 불찰이었던 것이다.
일본인 포로들은 8월14일 밤 11시 30분 히로히토 일본국왕의 항복방송을 들었다. 그의 음성은 느릿느릿했으나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는 세 차례나 항복한다는 말을 거듭했다. 포로들은 일제히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고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봉과 창섭이 다시 만난 것은 일본으로 가는 후송 선에서였다. 일본군에 의해 사격이 가해졌던 태봉은 다행스럽게도 총알이 심장을 비껴나가 어깨부위를 관통했고 피를 많이 흘렸으나 절벽 아래로 추락한지 이틀 만에 미군에 의해 구조됐다. 다행히 바닷물이 그의 상처를 잘 소독해준 탓에 상처도 금방 아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이판과 티니안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끝에 재회할 수 있었다.
감회가 남달랐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었다. 살았다는 안도감대신 허망하기만 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냥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는 석양을 보자니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저 무력하다는 생각,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느낌만 있을 뿐이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마쯔다소위였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오만한 자들이 권력을 믿고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어. 세상을 바꿔야 해” 그가 그렇게 애지중지하고 탐독했던 책은 칼 막스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그길로 서로 간 형제의 의를 맺고 보통사람들이 균등하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자고 다짐하게 되었다.
배는 고동소리를 길게 한번 내뱉고 서야 부두에 닿았다. 날은 차고 바다는 성글었다. “이보게, 우리 집 가서 좀 쉬었다가 제주로 가지 않겠나.” “아닐세. 영도에 형이 한 분계시네. 조선소 일을 했는데 가뵈어야 하지 않겠나?” 짐이래야 어깨에 맨 배낭 하나가 전부다. 두 사람은 중앙동으로 나왔다가 그길로 북과 남으로 갈라섰다....(끝)
글/ 방영훈(동두천 영상단지추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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