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송림의 이야기 정거장
외손자 이음 대리만족
올해 2023년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의 해도 저물어 가는데, 나는 외손자 박이음(사진) 이야기로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으려 한다.
이음이는 내년 3월 24일이 돼야 세 번째 생일을 맞는데, 그 하루 뒤인 25일은 내 생일이다. 녀석이 하루만 늦게 태어났다면 자칫 할배와 생일이 겹칠 뻔했다. 그야 어쨌든 이음은 남북통일과 동서화합, 온 세상을 사방팔방 하나로 이어줄 우리네 식구들의 바람이 담긴 이름이다.
내가 명색이 6.25 전쟁둥이 작가로서 <조통수(祖國統一喇叭手)> 등을 비롯해 통일연극과 1인극 시리즈를 여러 편 무대에 올리지 않았는가! 내년 봄 이음과 내 생일쯤에 맞춰 ‘최송림 희곡집1, 2’도 세상 빛을 볼 것 같다.
그런데 손자가 뛰노는 귀엽고 행복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저만할 때는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문득 밟히는 까닭은 무슨 심보일까? 동족상잔 전쟁 통에 경남 고성(固城) 거류산 아래 간사지 갯마을 농어촌에 6남매 촌놈으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는데, 너나없이 다들 가난하게 자란 기억밖에 없다.
우리 동네 맞은편 바닷가에서 무당들이 배고파 굶어죽은 귀신을 저승으로 보내며 ‘바다 건너 최부잣집에 들러 밥이나 실컷 얻어먹고 떠나라’고 주술을 할 정도로 동네에서 그중 잘산다는 우리 집인데도 말이다. 쌀밥은커녕 보리밥에 쑥떡, 개떡만 배불리 먹어도 부자 소릴 듣던 시절의 이야기다.
아참, 나는 <간사지>라는 제목의 연극을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올린 바도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5창작활성화 사전지원 작품으로 선정되어 고(故) 강태기, 이경영 연기자 등이 열연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친구인 강배우는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벌써 10년인데, 내가 쓰고 그가 초연한 모노드라마 <돈>을 김시유 1인극으로 고인의 기일을 전후해 연우무대 소극장에서 추모 공연하여 그리움을 달랬다. 그가 갑자기 세상을 등지고 하늘나라로 떠난 후 나는 <동숭동 밤하늘엔 별이 뜨지 않는다> 희곡도 발표하고, 공연도 했었다. 이제나 저제나 고향을 생각하면 궁핍한 청승보다 덕담을 조금 보탠다는 게 이야기가 잠시 딴 데로 흐른 모양새다.
아무쪼록 요즘 태어난 아이들 성장환경은 어떤가? 우리 이음이만 봐도 풍성한 먹거리는 물론 집안에 갖가지 장난감과 인형이 발 디딜 틈 없이 수두룩하다. 그런가 하면 작은 어린이 도서관을 방불케 할 만큼 가득 쌓인 그림 동화책들…. 부모는 물론 할머니와 이모가 틈만 나면 읽어주고, 곧잘 따라 해서 그런지 지적 발육도 몸 건강 못지않게 월등하다. 손자는 벌써 어른 뺨칠 정도로 못하는 말이 없을 수준이라고 자랑하면 보통 할배로서 지나친 칭찬일까? 언젠가 내가 ‘이음인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물었더니 ‘분홍!’이라고 대답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전혀 뜻밖의 핑크 빛이 꿈이라니, 나는 아이답지 않은 엉뚱한 시적 감성에 면도를 안 한 것도 깜빡 잊고 와락 뽀뽀를 해줬다. 그랬더니 ‘까끌까끌’하다면서 도망친다. 손자의 부모만 해도 그렇다. 이음이 엄마는 최하늬 프리랜서 아나운서이고, 아빠는 서울 영등포시장 로터리에 자리 잡은 연세우리들치과 박봉진 원장이다. 이만하면 부모 잘 만나 태어난 게 아닌가! 내가 이런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가난한 작가가 아니라 쬐끔 부유한 작가로 살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이음이의 풍요로움에 정체불명의 쓸데없고도 아름다운 질투를 느낌과 동시에 힐링된 기분으로 복권을 한 장 샀는데, 그게 4등 당첨되어 벌써부터 손자 덕을 봤다. 나는 5만원 당첨금을 찾아 이음에게 만원을 주고 기념사진(?)까지 한 컷 챙기며 소 시민의 기쁨을 누린 셈이다.
그야말로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세상에 남부러울 것 없이 무럭무럭 성장하는 꿈나무, 내 유일한 사내 핏줄 이음이 속으로 들어가며 나를 슬쩍 덧씌워 본다.
이음이를 통해 새로운 삶이 이어지듯 나를 훌훌 털어버리고 짐짓 내가 다시 태어나 커간다는 생뚱맞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나는 오늘도 내 어릴 적 추억을 떠올려 놓고 사랑스럽고 총명한 이음이의 넉넉함을 바라보며 대리 만족의 행복감을 만끽, 웃음보따리를 활짝 꽃 피운다. 글/ 최송림(본지 논설위원,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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