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 컬럼 '견리사의(見利思義)'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말은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 말과 비슷한 맥락의 말이 있다. '하필왈리(何必曰利)'라는 말도 있다. 이는 “왜 이익을 말하느냐?”는 뜻이다. 이는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한 말이다.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 시대로, 각각의 제후들이 자신의 국가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던 시절이었다. 양혜왕은 맹자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나라를 이롭게 하고 풍요롭게 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를 물었다. 이때 맹자가 했던 대답이 바로 “하필왈리”이다. 이 말은 대답이자 동시에 질문이기도 하다. 맹자의 이 대답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통치자는 언제나 공평하게 분배하고,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지,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이와 달리 언제나 이익과 더불어 정의를 말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말은 맹자 사상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해석해 보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맹자는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속담이 함축하고 있듯이, 통치자가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백성을 배불리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에 있다.
백성들이 항상 생산하여 먹을 것이 있는 상태 곧 항산(恒産·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일정한 재산과 생업)이 없으면, 항심(恒心·언제나 변치 않는 올바른 마음)도 없다고 말했다. 즉 일정한 경제 수준을 보장해 주어야만 일반 백성이 생업에 전념하며 '인과 의'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자리가 없어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으면 남에게 베풀 수도 없고, 남의 것을 훔칠 생각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맹자는 경제 문제가 국가 경영에 있어서 제일 우선해야 할 문제임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경제 문제가 가장 중요하기에 언뜻 보면, 국가 통치의 문제는 이것으로 다 해결될 수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맹자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항산과 더불어 항상심(恒常心)을 강조했다. 백성들이 흔들리지 않는 도덕심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누구나 어린아이가 우물가로 기어가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고, 남의 불행을 보면 연민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를 잘 발휘할 때, 도덕적인 사회,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될 수 있다고 맹자는 보았다.
마이클 샌댈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오늘날 이익만을 생각하는 시장 만능주의 사회에서 도덕적인 가치가 점차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시장의 논리로만 해결할 수 없는 정의의 영역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가 걱정하고 있듯이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것이 돈이면 다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차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이 시장 전체주의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 구조를 명쾌하게 설명한 애덤 스미스 조차도 모든 것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국가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스미스가 강조했던 것은 맹자와 마찬가지로 그의 책 제목 『국부론』이 시사하고 있듯이, 국가의 부를 늘이기 위한 방법으로 각자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고자 한 것은 각자가 이익 추구를 통한 국가의 부에만 있지 않았다. 『국부론』을 쓰기 14년 전에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을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맹자처럼 누구나 남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고, 이러한 연민의 감정을 잘 살려서 ‘공정한 관찰자’의 관점에서 행동할 때, 비로소 정의로운 국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스미스 또한 국가의 부와 더불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도덕성에 기초한 정의를 강조한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오로지 이익만을 강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애덤 스미스에 대한 심각한 오해다.
맹자나 애덤 스미스는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익을 추구하되, 도덕적인 정의가 살아 있어서 공정한 사회가 될 때, 비로소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맹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와 마찬가지로 저마다 국가의 이익만 생각하고, 군대를 강화하는 일에 만 집중하고 있다. 다시 말해 힘의 정치(power politics)가 지배하고, 도덕 정치(moral politics)가 사라져 가고 있다.
맹자와 스미스가 강조했듯이, 이익을 추구하며 부유하게 사는 것은 인간 삶에 있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것만이 지배할 때, 사회는 정글 사회, 야만 사회가 된다. 우리가 전체주의의 독재 사회를 ‘야만’으로 비판하듯이, 시장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 또한 또 다른 의미의 ‘야만’이다. 모든 것을 시장으로만 해결하려는 생각이 지배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익을 보면, 언제나 그와 동시에 도덕과 정의를 같이 생각하는 태도이다. 글/ 서기원 목사(북경기신문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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